나는 누구의 중력으로 살고 있는가?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졌다. 위산 역류인가 싶어 병원에 갔지만 위는 깨끗하다는 말만 들었다. 다음 주에도 가슴이 답답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정밀 검진 결과 심장은 정상이었다. 그러다 왼쪽 귀가 먹먹해지더니 급발성 난청까지 겹쳤다. 운동부하검사까지 받고 나서야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경정신과를 한 번 가 보시겠어요?”
“직장인이면 다 겪는 스트레스”라고 넘겨 왔던 일들이 몸에서는 이미 생존 경보로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의 무급 휴직, 강제 멈춤이 시작됐다.
월급이라는 산소호흡기가 끊기자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조직’이라는 우주정거장 안에서 살아왔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생존이 보장된 무중력 상태에서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채 목표와 성과만을 좇아 둥둥 떠다녔던 것이다.
퇴직은 무중력에서 중력이 작동하는 지구로의 귀환과 닮았다. 장기간 우주에서 체류했던 우주인이 지구에 내려오자마자 제대로 걷지 못하듯, 조직을 떠난 중장년도 곧바로 일어서기 어렵다. 돈, 관계, 건강, 시간, 정체성이라는 중력이 한꺼번에 몸 위로 떨어진다. 그래서 퇴직 이후의 시간은 재활에 가깝다. 근육만이 아니라 신념의 근육이 필요하다. 조직의 명함이 아니라 ‘나’로 서는 균형 감각을 다시 세워야 한다.
50대의 퇴직은 종종 인생의 리셋 버튼처럼 눌린다. 커리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순간 “지금까지의 나는 무엇이었나”를 묻게 된다. 그런데 그 질문 속에는 반대의 문장도 숨어 있다. “지금부터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문장이다. 질문이 바뀐다. ‘남이 만든 일자리(Job)’를 어디서 구할까가 아니라 ‘나만의 일터(Workplace)’를 어떻게 만들까로 말이다.
50대 이후 퇴직의 미래를 미리 보았던 나는 복직한 뒤 앞으로 살아가야 할 ‘1인 기업가’를 사전에 훈련해 왔다. 동료와 경쟁하되 직급으로 누르지 않고, 같은 피드백을 받고 같은 거절을 견디는 쪽을 택한다. 주말도 쉬는 시간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해도 지치지 않는 일”을 찾는 실험 시간으로 쓴다. 토요일에 했는데 일요일에도 하고 싶고, 다음 주 토요일이 기다려지는 일을 찾는 과정이다. 퇴직 이후에는 임원이 아니라 나 자신이 기업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무급 휴직 3개월의 멈춤은 내게 ‘인디언 서머’였다. 늦가을에 잠깐 찾아오는 따뜻한 날씨처럼, 인생 후반부에 찾아온 뜻밖의 기회였다. 이상 현상처럼 보이지만 자연에게는 마지막 성장의 기회로 작동한다. 50대도 마찬가지다. 쇠퇴만 남은 시간이 아니라, 무르익은 경험과 직관을 삶으로 옮길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어떤 중력에 영향을 받고 있을까? 지구가 태양의 중력 안에서 궤도를 돌 듯, 사람도 보이지 않는 끌림 안에서 시간을 돈다. 낮과 밤이 자전의 반복이라면, 내 삶의 낮과 밤은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선택들로 만들어진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며 내일도 하게 될 일들, 그 반복이 곧 내 중력이다. 퇴직 이후의 일터는 바깥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떤 반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만의 중력이 생기고 그 중력이 일터의 궤도가 된다. 그 중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의 시작이다. 중장년은 남의 중력에 끌려 ‘어떻게(How)’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력인 ‘왜(Why)’로 살아가야 한다.
‘왜(Why)’는 찾는 것이 아니라 결정해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면, 나의 중력(반복)을 따라 ‘왜(Why)’ 하는지도 정해진다. 그 중력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죽어갈 수 있다. 중장년에게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는 건 부정맥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가슴은 여전히 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