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
2019년에 3개월 병가 휴직을 하며, 나는 10년 안에 대답해야 할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질문 때문에 정신이 더 마르고 더 힘들어졌다. 일은 멈췄는데 내 존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일하는 나’로만 나를 설명해 왔다. 일이 사라지자, 나를 설명할 언어도 같이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질문 때문에 복직 후 5년 동안 은퇴를 준비했다. 경제적 자유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찾는 준비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을 멈춰도 무너지지 않는 나’를 만드는 준비였다. 이 질문은 나를 소진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창조했다.
휴직 기간에 친구가 몸 보신을 해 준다며 시골에 있는 지인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여러 가축을 키우면서 아는 사람만 와서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마당 테이블에 앉아 닭 한 마리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주변으로 닭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몰골이 민망할 정도였다.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병든 것처럼 마른 닭들이었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가 설명해 주었다. 공장식 양계장에서 가져온 닭은 겉보기에는 빨리 자라지만, 몸의 시스템이 망가진 상태라고 했다. 걷지 않고 날개를 쓰지 못하며 흙을 밟지 못한 채, 햇빛도 밤낮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닭에게 곧바로 좋은 먹이를 주면 오히려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잠깐 멈추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멈춤 사이에 장의 흐름이 다시 정렬되고, 간·췌장의 부담이 줄며, 면역 반응도 정상화된다고 했다. 몸이 최소 시스템만 가동한 뒤 흐름이 정렬되면, 그때 비로소 햇빛과 흙, 걷기와 모래 목욕이 있는 마당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니 좀비 같은 닭의 몰골은 병든 모습이 아니라, 금식으로 회복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공장식은 닭을 ‘살게’ 하지만, 마당은 닭을 ‘존재로’ 회복시킨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이상하게 내 이야기처럼 들렸다. 과잉 시스템 속에서 빨리 자라게 만들던 시절, 나는 ‘성과’로 살아 있었지만 ‘존재’로는 망가져 있었다. 그러다 멈춤이 왔다. 몸이 먼저 결론을 내렸고, 삶이 강제로 리셋 버튼을 눌렀다. 그 멈춤은 벌이 아니라 회복의 문법이었다.
은퇴는 끝이 아니다. 은퇴는 나의 마당을 만드는 일이다. 나를 살리는 리듬, 나를 회복시키는 감각, 나를 다시 걷게 하는 삶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도,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도, 나는 여전히 나다. 이제는 ‘일’이 아니라 ‘존재’로 살아가면 된다.
휴직을 하며 가졌던 질문이 나를 괴롭혔지만, 닭들을 보며 그 질문의 대답을 찾았고 그 대답이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내 삶의 새로운 정상으로 바꾸려 한다.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이 질문은 인생의 금식이다.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비워내는 시간이었고, 그 고요함이 나를 다시 정렬시켰다.
조직에서의 은퇴가 있다면, 인생에서 그것은 조퇴일 뿐이다. 이제 나는 남은 시간을 ‘일’이 아니라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