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션에서는 그 검은 구멍에 이름을 붙여보기로 했다. 검은 단발머리의 우울한 여자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그 구멍에 이름을 붙여봤어요. ‘눈물 저장소’라고요. 내 마음엔 언제나 찰랑찰랑 거리며 흔들리고 있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자세히 봤더니 바로 그 검은 구멍에 언제나 눈물이 가득 차 있던 거예요. 기뻐서 웃고 있다가도, 느닷없이 찰랑 거리며, 자기가 눈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주기도 해요. 마치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눈물을 잊지 말라는 듯이 말이죠.”
허무감에 몸부림치던 중년 남성이 이어서 말했다.
“저도 그 검은 구멍을 관찰해 봤습니다. 그런데 검은 바닥 아래로 끝도 없는 계단이 내려가고 있더군요. 한참 내려가도 끝이 나오지 않았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을 것 같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지만, 혹시 끝이 없는 게 아닌지 점점 두려워져서 더 내려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지하실’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중독자 아들로 무력감을 느끼던 노년의 여성은 말했다.
“저는 ‘태풍의 눈’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아들을 잃은 슬픔, 자책감, 괴로움 그 모든 감정들이 너무 강렬하게 얽혀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제가 쓸려가 버릴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그 감정의 강렬한 소용돌이에 쓸려가게 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한번 생각해 보았죠. 그렇다고 제가 죽거나, 이런 표현 정도는 써도 되겠죠?”
여자가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제 존재가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크게 다치진 않을까 좀 걱정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몇십 년간 이 증상으로 고통받아 왔지만, 다행히 제가 사라져 버리거나, 크게 다치진 않고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노년의 여성이 이야기를 마친 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허무주의 명상가는 잠시 둘러보더니 헝클어진 머리에 퀭한 눈, 초췌한 모습을 한 깡마른 남성에게 물었다.
“회원님, 회원님은 지난 며칠간 나오지 않으셨지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
“네 저는 일주일 정도 못 왔어요. 규칙적으로 생활하려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담당의사가 조울증엔 규칙적인 생활이 정말 중요하다고 항상 말하거든요.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신체리듬도 되찾고, 충동 조절도 잘 되고, 약물 치료 반응도 좋다고.. 그런데 그게 조절이 잘 안 되네요.”
남자는 초조한 듯 손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면, 즉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거든요. 지난번에도 길을 가다가,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봐서, 집으로 바로 돌아가 밤새 그림을 완성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이대로 가면 약물 용량을 더 높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뭐가 쉽지 않다는 말씀이시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제 마음의 충동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저는 너무 두려워요. 제가 제 마음을 조절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러시군요. 지난 시간엔 저희 회원분들과 함께 마음속에 있는 검고 깊은 구멍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습니다. 대부분 분들의 마음속에 비슷한 구멍이 있더군요. 혹시 회원님 마음속에서도 그런 구멍을 느낀 적이 있었나요?”
허무주의 명상가가 물었다.
“잠시만요… 아, 그럴 때 있었네요. 제 작품이 인정받지 못할 때, 아니, 이해받지 못할 때? 그럴 때… 그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회원님의 작품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그 흔적을 남기지 못할 까봐 두려운 건가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 작품이 명작으로 인정받고 길이길이 기억되고..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저 아름다운 순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강박증이 있거든요.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그걸 어떻게든 표현해야 살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아름다운 순간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슬퍼서… 강박증이 생긴 것 같아요.”
처음엔 주저하며 말을 이어가던 남성이 점점 확신에 차오르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 그림이 대대손손 기억에 남지 않아도 돼요. 제 이름도 그냥 잊혀도 되죠. 그냥 단 한 사람에게라도 제가 느낀 그 아름다운 빛을 전해주고 싶어요. 없어져 버린 그 아름다운 순간을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남길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할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도 제 그림을 진심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아름다움을 향한 제 모든 열정과 희망이, 그 누구의 마음에도 담기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때 저는 철저하게 외롭고 버림받은 기분이 들어요. 가끔은 제 모든 행실이 미친 예술가의 기행이라고 가볍게 여겨지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저는 영원히 검은 구멍에 빠져서 해방되지 못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요.”
“우리 화가분의 검은 구멍은 아마도, 우리 인간이 가진 본질적 구멍이 아닐까 싶네요.”
화가는 허무주의 명상가의 말을 끊으며 좀 더 격앙된 톤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너무나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제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엄청 고양된 상태로 구상을 하기 시작하죠. 이럴 땐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힘든 줄 모른답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캔버스에 가득 물감을 바르기 시작하면서, 저는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화가는 꿈을 꾸듯이 허공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삐딱하게 저으며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게 뭘까요? 제가 포착하지 못하고, 캔버스에 옮기지 못하면, 결국 어느 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제가 그토록 매달리는 그 아름다움이란 뭘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저 느끼고 표현할 뿐이죠.”
소년은 도통 이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우울하게 말하다가도 갑자기 폭발하듯이 소리치며 말하는 이 난폭한 남자가 좀 무섭게 느껴질 뿐이었다.
소년은 두 번째 세션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