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울렁거리는 마음의 행방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무엇이 소년을 마음을 이렇게 휩쓸고 있는 것일까. 화가의 고백을 듣고 소년의 내면에서 조용히 번지던 울림은 점차 그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사실, 그 화가처럼, 내 삶을 사랑하고 싶었던 걸까. 근데 사랑이 도대체 뭐길래?’
소년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화가의 말처럼 닫고 싶은데 자꾸 열리는 것, 그것이 사랑일까?’
소년은 너무 아프지만 계속 사랑하고 싶다는 화가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애틋하게 여긴다는 게 너무 아파서, 도망치고, 모른 척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닐까?’
소년은 자신이 툭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내가 존재하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그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걸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자기 자신에게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나지만, 조금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건 분명히 나의 욕심 같은데…’
소년은 마음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욕심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중요한 존재이고 싶다는 생각은, 소년 스스로에겐 너무 큰 욕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건, 그래 말도 안 돼.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는 건? 아니, 흔적은 아니라도 어떤 순간을 공유하는 건? 보잘것없고, 늘 도망치고 싶던 나지만, 아주 작은 의미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선 소년은 손을 씻고 나와서 무의식적으로 식탁에 앉았다. 로봇이 가져오는 뉴트리팩을 아무 생각 없이 비운 뒤, 자동반응처럼 씻고 잠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소년의 귀에 엄마의 절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엄마의 절규 소리가, 아무 의미 없는 배경음이 되면서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몇 년 만에 잡은 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 방문의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엄마의 방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에 회색빛 얼굴, 삐쩍 마른 몸으로 나뭇가지처럼 구부정하게 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외양은 많이 변했어도, 소년은 자신의 엄마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좁은 방 안에서 엄마는 굉장한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돌봄 로봇은 엄마를 감싸고 약을 엄마의 입에 털어 넣고 있었고, 엄마는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소년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로봇을 떼어내고 소년은 엄마를 안았다. 하지만 엄마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 순간, 소년은 엄마를 감싸 안은 자신의 윗 팔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붉은 핏방울이었다.
엄마가 들고 있던 펜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제야 소년의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이 차올랐다. 소년은 황급히 엄마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래 맞아. 이 세상은 비참함이었구나.’
잠시 잊고 있던 이 세상의 본질이 다시금 소년의 마음에 아리게 콕 박혀왔다.
돌봄 로봇이 엄마 방에서 엄마를 케어하는 동안, 소년은 어깨를 붙잡고 집 밖으로 탈출했다. 소년은 X박사에게 바로 가려했지만, 좌표가 적힌 종이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다시 집에 돌아가기도 싫고, 박사를 찾아갈 수도 없는 소년은, 발길을 숲길로 돌렸다. 소년에겐 폐허가 된 도서관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서로봇을 작동시키자, 로봇은 바로 소년의 상처를 알아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상처를 확인하세요.”
“아니야. 그냥 피만 좀 나다 그칠 거야. 팔 이렇게 움직이는 건 문제없어.”
소년은 로봇의 눈앞에서 팔을 흔들어 보였다. 팔을 흔들다 바닥에 주저앉은 소년 곁에 사서로봇이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지구상에 어느 장소도, 소년이 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증발만이 답이야.’
소년은 생각했다.
“사서로봇, 지난번에 나랑 같이 찾아봤던 경도랑 위도 기억해?”
“데이터 베이스를 검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후에 로봇이 대답했다.
“찾았습니다.”
“나 거기에 가야겠어. 나,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닥터 X에게 가야겠어.”
사서 로봇은 오래된 지도책을 찾아와서 위치를 다시 설명해 줬다.
그때 소년의 전자팔찌가 울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조급해졌다.
“나 가야 해. 나 지금 잡힐 수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엄마처럼 멍하게 살거나 가족을 공격하게 되는 것도 죽기보다 싫어. 나 좀 도와줘.”
소년의 말을 가만히 듣던 로봇이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관절 하나를 전자팔찌 띠 안에 끼웠다.
“조심하세요. 약간 뜨거울 수 있습니다.”
로봇의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쇳소리와 타는 냄새와 함께 로봇의 손가락 끝이 으깨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팔찌가 절단되었다. 로봇의 손끝도 부서져 있었다.
그때 도서관 창밖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리를 통과해 들어왔다. 흐린 불빛은 책무덤이 쌓인 도서관 내부를 비추었다.
“벌써 왔나 봐. 나 어쩌지, 나 잡히면 안 되는데. 가야 하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을 구르는 소년의 손을, 사서로봇이 잡아끌었다. 로봇은 입구 반대편의 서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서고 뒤쪽으로 가면 작은 철문이 있습니다. 문을 열면 주차장의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어요. 나가서 수풀 쪽으로 도망가세요.”
사서로봇은 지도를 찢어 소년의 손에 꼭 쥐어주며 말했다.
“고.. 고마워. 우리 다시 또 만나자.”
소년은 황급히 서고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