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순간, 네가 찾아온 거야. 하늘에서 동반자를 내려준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로봇을 시켜 너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
박사는 로봇과 소년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나는 종교를 잃은 지 오래됐어. 우리 사회가 모두 종교를 잃었지. 급변하고 붕괴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지탱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윤리도 종교도, 모두 형식만 겨우 따라오며 버텼지. 그동안 사람들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무너져야만 했지.”
박사가 씁쓸한 듯이 바닥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너는 왜 이곳에 온 거지?”
“그냥 제가 존재하는 게 아무 이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나 하나 사라져도 이 세상에는 별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는데, 학교에서는 그리고 교정국에서는 사람의 생명이 너무 소중하다는 이유로 저를 감시하고 있죠. 집에는 엄마가 항상 약에 취해 누워있고,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공격하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들자, 소년의 눈에서 문득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제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없어져도 슬퍼할 사람도 하나 없어요.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져요.”
“그렇구나. 그럼 나와 같이 가면 되겠다. 내가 주저했던 이유가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너와 함께라면 쉽게 버튼을 누를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왜 주저하신 거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증발을 도우셨다면서.”
“글쎄다. 사실 내가 요즘엔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자주 맞는데, 이제 진통제도 약발이 듣지 않는지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이것보단 죽는 게 낫겠다 싶은데, 참 이상하더구나. 막상 증발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야.”
박사는 고개를 가로지으며 말했다.
“내게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 난 오직 증발을 돕는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단다. 사람들에게 죽을 자유를 주고, 진실로 존재의 자유를 준다는 자부심이 있었지. 그런데 막상 내가 버튼을 못 누르고 주저하다 보니, 지난 내 시간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더구나.”
“박사님께서 증발을 도와준 사람들은, 마지막에 어떤 표정이었나요?”
“결연하다가, 멍해지다가, 눈물이 흐르기도 했지. 생각해 보니, 대부분은 두려워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박사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자신의 선택을 물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그때마다 나는 그게 아주 일시적인 두려움이라 생각했어. 감정의 속임수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들을 설득했어. 일시적인 감정의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그들이 다시 돌아간다 해도 삶은 그대로일 거라고. 당신은 결국 다시 이곳에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들이 설득되던가요?”
“쉽진 않았어… 하지만… 나는 버튼을 눌러 주었지… 그게 그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들이 주저하는 것도,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나약한 마음이 드러나는…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했어…”
“그들이 증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버튼을 눌렀다고요?”
소년은 깜짝 놀러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비열한 웃음을 감추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징벌을 앞두고선 자신이 진심으로 바뀔 거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겠지만, 다시 원래의 악한 습성으로 되돌아가는 게 사람이야. 그들이 삶의 미련이라는 속임수에 속아서 더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게, 내가 결단을 내려준 거야.”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럼 박사님은 왜 주저하고 계신 거죠?”
“두렵고, 외롭고, 무섭고, 더 살고 싶은 미련.. 이 피어나. 통증이 너무 심한데, 또 가끔씩 말끔하게 통증이 물러나면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더군. 그런 순간들이 가끔씩 와서 머물다 가서 그런지, 사는 걸 그만두고 싶지 않아.”
갑자기 창백해진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년이 작게 속삭였다.
“박사님은 사람들을 증발시켜 준 게 아니었군요. 사람들을 죽여 오신 거예요.”
소년의 말을 들은 박사는 화들짝 놀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아니야. 나는 그들에게 죽을 자유를 줬을 뿐이야. 그들 대신 버튼을 눌러준 것뿐이라고. 내가 주저한 건? 사실 두려움이나 미련 때문이 아니야. 사실 마지막으로 증발시켜 줄 너를 기다렸던 거야.”
박사는 소리 지르며 소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소년은 뒷걸음치며 말했다.
“박사님, 자신에게 솔직해지세요.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순간적인 두려움에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어요.”
소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채지 못한 말들을 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