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4) 증발과 폭발

by 송영채

“내가 사람들을 죽인 걸까? 마지막일지도 모를 순간에 그들에게 찾아온 깨달음을, 짓밟은 걸까?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사람들을 구해 온 내가?”


박사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같은 말들을 반복하며 뱉어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 인생은 쓸모 있었어. 수많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멈춰준 게 바로 나야. 내가 아니었으면 스스로를 잃고 침대에 묶여 떠돌게 될 영혼들이었다고. 내 일은 고귀한 일이었어! 내가 사람들을 죽인 거라고? 지금 캡슐 안에 있는 나처럼 주저하고 망설이던 사람들, 그 표정들.. 그래, 사실 난 두려워. 그들이 절규하던 소리가 귀에서 계속 울리고 있어. 그들이 나에게 찾아와 소리치고 있는 걸까?”


박사는 벌겋게 상기되었다가도, 풀이 죽어 흐느끼기도 하면서 종적 없는 생각들을 읊고 또 읊었다.


“아니야. 나는 옳은 일을 한 거야. 내가 죽어도 증발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아. 내가 증발되고 자동 소각되고 나면, 내일 아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찾아올 거고, 내 후임자가 나와서 근무를 시작할 거야. 증발 프로젝트는 계속될 거라고. 이건 정말 가치 있는 일이야. 존재의 자유를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 너는 절대 이해 못 해.”


박사는 별안간 잊고 있던 소년이 생각났는지 소년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박사는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을 죽인 거라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빼앗은 거라고? 말도 안 돼…"


박사는 점점 다시 상기되기 시작하더니 눈을 부릅뜨며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야! 이곳은 지옥이야! 내가 그들을 도운 거라고!”


박사는 다시금 소년을 향해 양팔을 휘저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 이리 와봐. 우리 같이 가자. 여기 앞에, 빨간색 증발버튼 보이지? 그 바로 옆에 있는 검은색 버튼이 바로 폭발버튼이야. 네가 손을 뻗어서 바로 저 폭발버튼을 눌러라. 폭발버튼을 누르면 우리 둘은 이 건물이랑 같이 영원히 증발하는 거야. 그러면 더 이상의 X박사도, 증발도, 살인도 없을 거야. 이리 와! 이걸 누르라고!”


캡슐에 묶인 채 미친 듯이 절규하는 박사의 모습에 그만 하얗게 질려버려 뒷걸음질 치던 소년은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소년은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현관 밖으로 토해지듯 도망쳤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면서 소년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증발을 상상해 왔던 걸까 생각했다. 학교 수업을 받다가 무단 조퇴를 하듯 모면할 수 있는 그런 증발을 꿈꿔왔던 걸까? X박사를 만나면 자신을 현실로부터 간단하게 로그아웃 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증발센터에서 X박사의 절규를 듣고 난 뒤 소년의 마음은 더 이상 단순할 수 없었다. 소년의 마음속에선 어딘가가 찢기고 흐르고 펄럭이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먼 어딘가로 달아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다시 살고 싶어 졌다고, 증발을 원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빨간색 버튼을 누르는 박사의 얼굴을 상상해 봤다. 박사의 창백한 얼굴과 굳게 다문 입술, 감정을 잃은 시니컬한 눈동자와 망설이지 않는 손가락을 떠올려 봤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그것은 살인과 다름없었다. 원치 않는 마지막에 울렸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소년의 귓속에서도 웅웅 거리며 울리는 듯했다.


소년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숲길을 달려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도 모르는 사이 신발이 벗겨져 있던 왼쪽 발바닥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발바닥을 들어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년이 멈춰서 발바닥을 살펴보던 그때, 소년의 뒤편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중심을 잃고 쓰러진 소년이 놀라 뒤돌아보니 새벽의 여운을 머금은 숲 위로, 버섯 모양의 잿빛 구름이 일출을 닮은 다홍색 줄기 위로 피어올르고 있었다. X박사의 증발센터가 폭파되고 있던 것이다.


놀란 소년은 울면서 다시 숲길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풀숲에 소년의 피로 물든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다. 한참 달리다 나온 도시는 호젓한 새벽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에선 아직도 엄청난 굉음 소리가 가득 차 울리고 있었지만, 도시의 새벽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정표를 찾았다. 그곳은 소년의 집이 있는 교육중심부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는 보건중심부였다.


소년은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망연자실한 소년의 얼굴에 다홍빛 아침 햇살이 비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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