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건이 사라져도 남는 것, 마음
마지막 회사에 입사한 뒤 1년 동안, 나는 지독한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 그 기간 내내 나의 감정은 분노와 우울이었다. 업무를 주지 않거나, 성과를 가로채고, 다른 부서에 가서 부하 직원을 험담하는 직속 상사의 괴롭힘은 애교였다. 회의 때마다 면박을 주고, 밑도 끝도 없이 시비를 걸고, 의자를 발로 차고, 없는 꼬투리까지 만들어 주말에 전화를 걸어 난리를 치던 괴롭히던 사업부 사장의 괴롭힘을 견디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빌었다.
‘당신 자식이 회사를 다니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 이만큼만, 내가 당하는 만큼만 괴롭힘을 당하길 바랍니다.’
다 큰 성년이 된 자식을 ‘꼬맹이’라 부르며, 직원들 앞에서 자랑을 하던 그 사람에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나도 우리 부모님께 세상 둘도 없이 귀하고 소중한 자식입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생각을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고, 행동을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채로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아무리 다르게 행동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삶은 늘 내 편인지라, 더는 못 버티겠다 싶은 시기, 회사에서 나를 다른 부서로 이동시켰다. 미운털이 박힌 직원이라 사장과 직속상사가 내보내듯 보냈겠지만, 나는 그저 고마웠다. 심지어 새로 함께 일하게 된 상사 분은 그 회사에서 보기 드문 진짜 어른이었다.
부서를 옮기고 분노와 우울이 잠잠해지자 뭔가를 다시 할 힘이 생겼다. 운동을 시작했고, 공부를 했고, 창업 준비를 하면서 파란만장했던 그간의 모든 회사 생활을 조금씩 적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소설처럼 흩어 쓰던 글을 모아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빈 워드 파일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글의 색은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따뜻하게 채워졌고, 하나씩 쌓인 글들이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섯 달 동안, 대학 졸업 이후 겪었던 이른바 ‘좋소기업’ 생존기를 28편 올렸다. 그 사이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졌고, 그 해 10월 마지막 글을 올리며 첫 브런치북을 마감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했기에 가벼운 짐을 가지고 아쉬워하며 또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주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경비 아저씨께도 인사를 하고 눈물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백미러에 비친 회사 건물을 보며 인사했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지막 글의 풍경은, 그로부터 1년 뒤 실제로 회사를 떠나던 날과 사진처럼 똑같았다.
회사를 떠난 지 일 년이 채 안 된 지금, 마음이라는 땅은 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품이 넓어졌다. 불안보다는 설렘이, 걱정보다는 차분한 기다림이, 두려움보다는 용기가, 분노보다는 ‘그럴 수 있지’라는 여유가 생겼다. 언제나 괜찮은 건 아니지만 괜찮은 시간이 더 많아졌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살아간다. 여전히 생각과 에고에 사로잡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시끄러운 내 안의 목소리를 지켜보며 ‘얘 또 이러네..’하고 달래는 여유도 생겼다.
이 모든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마음이 조금씩 넓어지고 유연해지니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였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다른 감정이 일어났다. 마음이 바뀌니 생각이 바뀌었고, 생각이 바뀌니 말과 행동이 바뀌었다. 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여전히 헤매고 있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책과 글을 등불 삼아 더듬더듬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설령 삶이 무너지고, 모든 조건이 사라진다 해도, 내 안에는 여전히 고요하고 단단한 중심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비록 '행복'하지는 않을지라도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분명 한 평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붙잡지 않는 삶』 중
이 문장을 읽던 날, 왈칵 눈물이 났다. 나를 살게 한 그 단단한 중심이 고맙고 기특해서. 조건과 상황이 무너질 때마다 나까지 함께 무너진다고 믿어왔지만, 역할과 관계, 계획과 성과가 사라진다고 해서 나라는 집의 골조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 골조가 바로 마음이었다.
마음은 생각보다 먼저 있고, 행동보다 먼저 있고, 습관보다 먼저 있다. 마음은 과거의 이야기나 미래의 상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는 힘’이다. 이름은 달라도 뜻은 같다. 누군가는 ‘깨어 있기’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 생각이 정말 사실인가?’라고 자문한다. 결국 중요한 건 지금 내 마음을 살피고 아끼는 일이었다. 생각 이전의 나 – 고요하고 단단한 마음 말이다.
이 연재 내내 나는 스스로 한 가지를 물었다.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랑과 생각, 존재와 관계, 그리고 수없이 흔들린 날들. 그 모든 흔들림을 지나며 알게 된 한 가지: 모든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나는 오늘도 작게, 자주, 마음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첫 장을 다시 연다. 모든 조건이 사라져도 남는 것—그 마음을 믿는다.
에필로그 — ‘마음, 세상과 나를 잇다’
생각에서 시작해 마음으로, 행복과 걱정을 지나 감사와 상처의 흔적을 건너, 저는 지금의 마음에 닻을 내렸습니다. 마음이 가장 먼저라는 것을, 마음이 모든 것을 연결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과 나를 잇는 다리도, 나와 너를 잇는 다리도,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도 결국 지금-여기의 마음이었습니다.
읽어 주신 여러분의 시간 덕분에 저는 여러 번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