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넘어, 지금을 살다

마음, 세상과 나를 잇다

by 하우주

상처와 마주하기

몇 년 전 집단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 행정 보조로 꽤 오랜 기간 참여한 적이 있었다. 10여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상담사의 이야기도 듣고 참여자들이 개인 상담보다는 좀 더 공개적으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서 답을 찾기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규 프로그램 이외에도 매일 그날의 좋았던 일, 나빴던 일을 하나씩 적고 그에 대한 감정을 기록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좋았던 일’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반대로 나빴던 일은 줄줄이 떠올랐고, 기록된 감정의 대부분은 분노와 짜증이었다. 그 기록들이 쌓이자 나의 감정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충격과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건지, 그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되짚어 보며, 어떤 순간의 ‘사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 삶의 어느 부분에서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때 충족되지 못한 ‘좌절된 욕구’들은 무엇이었는지, 나의 ‘감정’들은 어떠했는지, 그 이후 어떤 ‘결핍’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파고들었다.


꽁꽁 싸매 억눌러 숨겨 두었던 상처들을 해부하듯 헤집어 하나하나 꺼내어 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굳이? 이걸 몰라도 나는 여태껏 잘 살았는데?’

라는 생각에 반발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외면할 수도 없었다. 과거의 상처들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해 있고, 아물지 않은 상처는 누군가 건드릴 때마다 통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마다 ‘상처를 준 누군가’에게 다시금 엄청난 분노가 올라와 마음이 힘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처가 자아가 될 때

‘상처’의 실체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을 무렵, 데이트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상대에 대한 분노, 사람에 대한 불신,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 그런 사람을 만난 자신을 향한 자괴감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자가발전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본인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는 듯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타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분노를 이어가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마치 ‘난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이니 내가 이러는 건 어쩔 수 없어’라는 듯, 이런 나를 당신들 모두가 이해해야 한다는 듯, ‘상처받은 나’는 그 친구의 ‘자아상’이 되고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반복되는 시니컬한 말투의 부정적인 이야기와 어두운 에너지에 진이 빠졌다. 이후 각자 다른 길을 가면서 그 친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를 보며 과거의 상처가 과거의 그 순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경험은 마음속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과거의 고통과 결합되어 지금의 나를 구성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얽힌 고통은 나의 말투, 반응, 습관, 성격을 형성하고 심지어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 '자아상'까지 만들어 냅니다. 삶을 나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상은 과거의 고통이 짜 놓은 드라마 속에서 자동으로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붙잡지 않는 삶] 中


인지하지 못하거나 아물지 못한 상처는 모르는 사이에 깊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조건적인 사랑에 상처받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부모에게 관심받기 위해 애쓰다가 오히려 어긋난 행동으로 관심받는 방법을 택하는 모습은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의 자아상을, 본인들이 선택하여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처는 내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상처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상처는 내 안에 있지만, 상처가 곧 ‘나’는 아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 안에 고통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존재를 받아들이세요. 그러나 그것에 대해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마세요. 그 감정들과 본질적인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 감정과 동일시하려는 자동적인 반응을 멈추고 그저 고요하게 바라보세요.


내 안의 상처들을 꺼내어 보던 시간 동안, ‘나를 직면한다’는 그 과정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고통스러웠고 순조롭지도 않았다. 외면하고 회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나를 바로 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상처들과 동일시되어 살아왔기에, 익숙한 그것을 놓는 것이 곧 나를 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긴 시간들을 견디고 나니 조금씩 그 상처들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주 느리게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내가 상처라고 믿었던 것들의 일부는 사실 상대의 의도가 아니었거나, 내 생각이 과장해 키운 경우도 많았다. 그때부터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힘들었겠네.. 그래도 누가 준다고 덥석덥석 받아오지 말자. 그 자리에 그냥 버리고 오지 뭐. 상처 줬다는 것도 내 착각일 수도 있어”




관찰자의 자리에서

고통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이 지금 존재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힘, 그 안에 깨어 있는 의식이 이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붙잡지 않는 삶] 中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게 혹은 작게 우리는 삶의 여러 면면에서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상처와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고 ‘나’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관찰자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상처는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상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 상처를 바라보는 존재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거가 짜놓은 드라마는 힘을 잃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언제나 현재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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