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세상과 나를 잇다
우리는 사실 끊임없이 떠들고, 재잘대고, 수다를 떨며 단 한순간도 가만있지 못하는 정신없는 그런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그것도 일평생을, 매 순간을 그와 함께 살고 있다. 함께 한 방을 쓰는 룸메이트 정도가 아니라 나와 한 몸을 함께 쓰고 있는 보디 메이트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친구가 누굴까? 그 친구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다.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목소리다. 이 생각은 도무지 조용히 하려 들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고요히 있지 못하고 떠들어댄다.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불쑥불쑥 내던진다.
- 법상 스님 [날마다 해피엔딩] 中 -
얼마 전 친한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흔한 직장인들이 그렇듯,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그런 하소연 혹은 넋두리였다. 이야기만 들어도 어떤 양상인지 그려지고 패턴이 보이는, 흔한 중소기업의 일상이었다.
20년 가까운 직장 생활 동안, 세상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기준의 ‘좋은’ 회사를 다녀본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일까지 겪었다고?!’를 연발하게 하는 유경험자로서 나는 그들의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에 나는 언제나 기꺼이 그들 편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표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던 동생은,
"다음 권고사직 대상이 저예요"
라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봤더니 동생은 회사에서 직원들을 어떤 식으로 권고사직을 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너한테 지금 나가라고 한 거야?”
라고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동생은 지금 나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대표가 직접적으로 몇 번의 사인을 준 것 같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미 퇴사할 마음은 가지고 있어 괜찮다고 하면서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황만을 보자면 동생은 아직 나가라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건 아니었다.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권고사직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다른 생각을 불러오고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오는 자가발전이 계속되어 이 친구가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든 일을 겪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에서 책임을 찾아 그 상황이나 타인을 원망하거나 혹은 내부로 책임을 돌려 나를 자책한다. 외부로 책임을 돌리는 것이 가장 쉽다.
보통은,
'저 사람이 나빴어, 이 상황이 좋지 않아’
라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외부에 대한 원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화살은 나에게로, 내부로 향한다.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왜 난 그걸 몰랐을까,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어, 다 내 탓이야’
그러다가 다시 비난이 외부로 향하고 또 내부로 향한다. 이런 식으로 비난과 원망을 포함한 부정적인 생각의 자가발전이 끊임없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때로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생각을 하고, 잠을 자면서도 관련된 꿈을 꾸고, 밥맛이 없어지기도 한다. 끊임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차고,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무거울 때도 있다(개인적인 경험이다). 결국 그 상황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 그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나를 괴롭힌다.
비단 힘든 일을 겪을 때만이 아니다.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뇌가 하루에 3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대부분이 부정적인 생각이거나 반복되는 생각이라고 한다.
법상스님의 책 내용처럼 나의 경우에도 이 생각이라는 녀석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심지어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불쑥불쑥 올라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각색할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무슨 일이 있기도 전에 먼저 저 앞에 가 있기도 했다.
물론 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을 시기,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정리가 되지 않고 정돈된 생각들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명상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리를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명상을 하려고 했을 때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 생각을 멈춰야 한다고 또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기도 했다. 나의 생각은 요가 동작을 할 때, 명상을 하려고 앉아 있을 때, 길을 걸을 때에도 조금의 고요함도 허락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의 쉼도 없이 생각은 끊임없이 올라와 나를 판단하고 상황을 판단했다. 끊임없는 생각들로 나는 번번이 명상에 실패했다. 지금도 비슷하다. 생각이 멈추고 마음이 집중되어 고요하고 맑은 상태로 머문다는 ‘삼매’라고 불리는 경험을 나는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연습 끝에, 지금의 나의 수준은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또 시작이군’이라며 그 생각들을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나’를 행동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 ‘생각’이라는 것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판단, 가치관, 기억 등에 걸러서 자기 식대로 해설하는 습성이 있다.
- 법상 스님 [날마다 해피엔딩] 中 -
어떤 일을 겪을 때 우리는 그 상황을 사진의 장면처럼 기억하지 않는다. 모든 상황들은 나의 생각, 경험, 가치관, 신념, 기분 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책이나 영화를 보더라도 똑같은 장면에서 우리는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봤을 때가 다르고,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나의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나에게 와닿는 부분이 다르다. 즉, 나의 어떠함, 나의 상태에 따라 모든 상황들을 기본적으로 ‘나’라는 필터를 거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으로 말한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그 순간은 내가 눈으로 본 상태 그대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필터에 의해 나도 모르게 이미 그 상황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참이고 진실인지는, 그 판단 기준의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왜곡된 나의 생각에 의해 편집된 이야기이자 감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산책을 통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바라보고 그 생각들이 진실인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나의 생각’이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잡한 마음에서 편안한 생각이 떠오를 리 없고, 각박한 마음에서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머릿속 가득한 생각 중에 정말 나에게 도움 되는 생각은 얼마나 될까, 생각만 하다가 우리는 정작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경우도 많다.
때로 생각은 멈추려 하면 할수록 더 요란스러워진다. 그러나 그 생각을 바라보고, 흘려보내고, 바람처럼 스쳐가게 두는 연습을 하다 보면, 아주 조금씩 머릿속에 고요의 공간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바라보는 존재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여유가 생길 때, 머릿속의 수많은 소리에 휩쓸리지 않을 때, 비로소 삶의 조용한 진실이 들려온다. 그제야 비로소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