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내 편이었다 – ‘감사’ 두 번째 이야기

마음, 세상과 나를 잇다

by 하우주
모든 일은
꼭 필요한 ‘일’이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만큼’ 일어난다.


입추가 지나자 아지의 털이 새로 나기 시작했다. 진도믹스인 아지는 거의 일 년 내내 털이 빠지지만 절기만큼은 늘 어김없어서, 처서 즈음이 되면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듯 꽤나 풍성한 겨울털이 채워진다. 매년 절기에 맞춰 몸을 달리 하는 동물들을 보면서 나는 늘 감탄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어김없이 변화하는 모습은 자연이 지닌 오래된 리듬을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애써 계획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이 많았고, 붙잡으려 했으나 흩어져 버린 인연들도 있었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리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좌절로 이어진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삶을 나의 바람대로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흐름에 맡길 때 가장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배운 실패, 나를 일으킨 한 마디

서른 중반, 절친과 카페를 하며 행복하게 살겠다며 그동안 모아둔 돈과 퇴직금을 모두 털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친구 이모의 카페를 인수했다. 그러나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친구는 생각보다 돈도 안 되고 멋지지도 않고 힘들기만 하다며 그만두겠다고 했다. 오히려 나중에 카페를 팔게 되면 더 비싸게 팔릴 수도 있으니 그 몫을 미리 달라고 했다. 미래에 가능성을 계산해 미리 돈을 줄 수도 없고, 애초에 돈 한 푼 내지 않았으니 지분이 없다고 하자, 친구는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난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친구를 잃고, 쉬는 날 없이 일하다 건강마저 잃고, 비수기인 겨울을 홀로 버텨내고, 건물주이기도 했던 친구 이모와의 관계가 껄끄러워 카페를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내가 너무 비싼 값에 카페를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수 금액의 2/3 가격에 카페를 정리하고 나니 통장에는 남은 금액은 고작 200만 원, 몇 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알뜰히 모아둔 결실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1년 6개월 간의 카페 사장 생활을 삶을 정리하고 난 후, 잘 알아보지 않은 나에게 화가 나면서도 내 인생은 왜 이토록 파란만장하고 순탄치 못한가 싶어 자조 섞인 마음으로 망연자실해 있었다. 마치 그 순간을 알고 계셨다는 듯, 엄마는 전화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사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말한들 니가 들었겠나, 벌써 하겠다고 미쳐 있는데.. 그래서 안 말렸지. 괜찮다, 남들은 사업하고 빚도 지는데 그래도 너는 빚은 안 졌잖아. 인생 공부했다 생각해. 그럼 또 뭐든 해서 산다”


그렇지, 빚은 안 졌지.. 엄마의 그 한마디가 나를 다시 숨 쉬게 했다. 무너진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다시 살아갈 힘이 내 안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그 힘 덕분에, 받아들이기 힘들어 곱씹기만 하던 지난 시간들을 차츰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납득할 수 없었던 일들이 어쩌면 나를 단련시키고, 다음 걸음을 내딛게 하려는 삶의 방식이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실패가 남긴 선물들

나에게 일어난 나빴던 일들은 결코 좋지는 않았지만, 최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경험들은 내가 내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카페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정년퇴직 후 더 많은 돈을 들여 시작했을 것이고, 더 큰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 일은 나에게 관계의 본질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관계는 언제든 정리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것을, 내가 진심으로 대했다고 해서 상대 역시 같은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이 아무리 온전히 닿기를 바라도 그것이 늘 100% 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만약 그 관계가 계속 이어졌다면, 친구에게 내어주는 걸 좋아했던 나는 여전히 손해를 감수하며 기꺼이 퍼주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 믿었던 첫 직장에서의 퇴사 - 쫓겨나다시피 한 그 경험, 그리고 그 이후 찾아온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떠났던 다섯 달의 여행, 다시 돌아와 맞닥뜨린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속에서 나는 숱하게 실수하고, 실패하며 값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다.

그 순간들은 하나같이 절망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모든 경험이 결국 내게 꼭 필요했던 일들이라는 것을. 삶은 언제나,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만큼의 일을 내 앞에 놓아주었고, 그 과정에서 또 필요한 인연을 만나게도 해 주었다.




삶은 늘 내 편이었다

입추가 지나자 풍성한 털로 계절을 준비하는 아지처럼, 나 또한 삶의 절기에 따라 흘러가는 중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다만 물 위에 떠 있는 통나무처럼, 삶이 이끄는 방향에 나를 맡길 뿐이다.

때로는 바위에 막히기도 하고, 거센 물살에 휘말리기도 하며, 생각지 못한 길로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바위도, 그 물살도, 그 길 또한 결국 나를 바다로 데려가기 위해 필요한 순간들이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들이 나를 위해 거기 있어준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삶은 언제나 내 편이었음을.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면 모든 길이 나를 지금 이 자리로 데려와 주었으니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선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살아온 길을 가만히 돌아보니 삶이란 무조건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있는 이대로 이렇게 아름다움을, 즐겁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음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 본연의 모습임을 사부작사부작 깨닫곤 한다’ - 법상 스님 [부자 수업, P34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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