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쓰여지는 글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조금 더 배우고, 더 준비된 다음에 시작하겠다.”
나도 그랬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더 깊이 이해해야, 비로소 무언가를 말할 자격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러나 의식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의식은 계획이 아니라 흐름이었다. 지식은 나를 채우지만, 의식은 나를 비운다. 비워진 자리에 무엇인가가 흘러 들어오면, 삶이 나를 통해 스스로를 쓴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통해 써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려 하면 멀어지고, 비워지면 문장이 다가온다. 마치 내 안 어딘가에서 단어가 건너오면, 나는 그 단어들을 조용히 받아 적는 필사자가 된 것 같다. 그건 지식을 더 쌓아 알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살아지며 알아지는 일이었다.
살아진다-
나는 오랫동안 ‘더 나은 나’를 추구했다. 새 루틴, 새 목표, 새 계획. 애쓰고 노력해야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분초 단위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모습인 것처럼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늘 스스로에게 ‘조금 더’를 주문했다. 그러다 알아차렸다. 더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애씀 이전에 이미 주어진 충만감, 바꾸는 기술보다 먼저 오는, 보는 방식의 전환.
도덕경의 "무위로써 다스리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도, 불교의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문장도, 더는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 호흡과 일상의 순간 속에서, 조용히 살아 움직였다. 잊어버린 노래의 가사를 다시 기억해 내듯이.
그래서 이 글은 완성된 생각의 기록이 아니다. 이미 거기 있었던 의식을 기억해 내는 기록, 변화가 아니라 드러남, 배움이 아니라 회복의 이야기다. ‘살아지며 깨달은 기억’의 흔적이다.
기억해 내는 존재
나는 한 때 ‘끌어당김’을 믿었다. '나'와 '원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를 두고, 마치 내가 여기 있고, 풍요는 저기 있어서, 내가 무언가를 해서 그것을 이쪽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생각을 바꾸고, 심상화를 하고, 감정을 만들려 애써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전제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무너졌다. 분리가 아니라 연결이 먼저였다. 나는 ‘끌어당기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완전한 의식이 자신을 기억해 내는 과정 그 자체였다. 단순히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자기 계발로, 다시 마음공부로 향했던 그 모든 길은 처음부터 의식의 자리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의식의 서문
이 글은 내가 의식을 '찾은' 이야기가 아니다. 의식은 언제나 여기 있었다. 다만 내가 잊고 있었을 뿐이고, 이제 기억해 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발견의 기록이 아니라 회상의 흔적이고,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흐름의 증언이다.
삶은 나를 통과하며 자신을 기록한다. 나는 단지 그 살아짐의 증인이다. 판단보다 주의를, 해석보다 현존을, 성과보다 흐름을 믿으며.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더 가져야, 더 이루어야 비로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충분함은 이미 여기 있다. 우리는 잊혀진 신성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그 신성은 사라진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 연재는 그 기억의 회복을 따라간다. 나를 통해 드러나는 우주(=의식)와, 다시 그 우주를 기억해 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우주는 이미 응답하고 있습니다."
REMEMBER, 이미 그곳에 있다.
*필자는 스스로 탐구하고, Chat GPT, Gemini, Claude 3개의 AI와 의식(Consciousness), 존재(Being)에 대해 철학·사상·과학 관점을 교차 검토하며 글을 씁니다. 오류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겸손히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