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지혜는 대기업, 공기업에 부지런히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어학 전공인 그녀가 함께 학교를 다닌 동기들을 보면 남자 동기들은 빠르게 취직이 결정되는 편이었고, 졸업 전에 이미 회사가 결정된 친구들은 대부분 해외 거주 출신이거나 외고 출신들이 많았다. 지혜는 그들과 출발선이 다른 것 같아 2학년 때부터 학점, 토익점수와 다른 스펙들도 잘 챙겼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4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까지 마치고 학원에서 알바를 하며 구직을 하며 졸업식을 앞둔 1월, 이력서를 넣었던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자고.
지혜는 취직하면 계속 입어야지 하며 맘먹고 비싸게 주고 산 정장을 꺼내 입고 전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다시 타고 5층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유리문으로 보니 4층에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지혜는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을 한 바퀴 돌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지 않은 구두 때문에 발목이 아팠다. 면접시간 15분을 남기고 지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
크지 않은 사무실은 따뜻한 공기로 채워져 있고 전체 사무실 한쪽 복도에 난 화분들이 쭉 놓여있었다. 책상 띄엄띄엄 세 분 정도가 앉아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와 쭈뼛거리는 그녀에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 좋은 인상의 남자 직원 한 분이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면접 보러 오셨어요?"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큰 목소리의 인사에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나이 지긋한 중년 두 분과 지혜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하얀 얼굴의 한 여직원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지혜에게 눈인사를 했다.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큰 테이블 하나가 있었고, 대표이사실 명패가 붙은 방에서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깎은 중년 남성이 나왔다.
"김지혜 씨? 반가워요"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대표실에서 나온 남자분이 인사를 건넸다. 큰 미소에 입가 위로 웃었을 때만 보이는 미소 주름이 두 줄로 생겼다. 대표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건네고는 한쪽 문닫힌 사무실 창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큰 외국인 한 명이 사무실 안 쪽에 앉아 있고 문 쪽에 있던 다른 외국인 한 명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지혜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네고 들어올 때 보았던 큰 테이블 쪽으로 지혜를 안내했다.
지혜는 외국인들과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영어를 곧잘 구사했다. 방학 때 학교에서 연결한 단기 연수도 다녀왔었고 과외와 알바로 모아 둔 돈으로 영어 학원도 꾸준히 다녔다. 단기 연수를 갔을 때도 그녀는 영어 실력을 올리려고 일부러 한국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외국 친구들을 만나 놀곤 했다. 외국 친구들과 바에 가서 맥주 한 두 병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내면 돈도 많이 들지 않고 노는 내내 영어를 말할 수 있었다. 가끔 만나는 한국 사람들끼리 가는 한국 식당은 너무 비쌌다. 지혜는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욕심도 있었고 어학에는 소질이 있는 듯했다. 화려한 스펙을 가진 대학 동기들에 비해 자신이 가진 무기가 너무 없는 것 같아, 그것 하나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예고도 없었고, 준비도 하지 못했지만 영어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면접을 마쳤고, 처음 지혜가 들어왔을 때 인상 좋은 표정으로 그녀를 반겨준 사람 좋아 보이던 남자분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음 주부터 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네, 가능합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도,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의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작은 회사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뽑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그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사하고 즐거웠다. 연봉은 세전 2,400만 원. 수습기간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지혜의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고 지혜는 날마다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출근을 했다. 첫 직장 생활은 중반까지는 아주, 아주 괜찮았다.
회사는 신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 계획이었고 지혜가 입사했을 때까지 매출은 없었지만 첫 매출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좋은 분이셨고 같이 일했던 직원분들이 좋았다. 사장님이 기존에 하던 회사를 매각하고 새롭게 회사를 차리자 같이 일하던 분들 중 몇 명이 따라왔다고 했고 지혜는 처음으로 이력서를 받고 면접을 봐서 뽑은 직원이자 회사의 막내였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업무 시작 전에 열 명도 채 안 되는 직원들이 사장님과 함께 회의를 하며 한 주를 시작했다. 월요일에 출근을 하면 회사 사무실에 여린 잎 녹차향이 가득했다. 사장님은 본인이 좋아한다는 최고급 녹차를 월요일 아침 미팅 전에 내려놓았다가 회의를 시작하면 직원들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그 시간이 기다려져서 지혜는 주말이 빨리 지나갔으면 했다. 하루는 차를 마시며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어떤 자리에 가도 교만하지 않게, 자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그렇게 멋진 말을 하시고는 늘 그렇듯 예의 그 밝은 큰 미소를 지으셨다. 지혜는 그때의 그 말을 그 이후로도 회사 생활을 하는 내내 기억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그렇게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장님도 좋으셨지만 같이 일하는 모든 분들이 좋은 분들이셨고 지혜를 이뻐하고 아껴줬다. 지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제나 빠릿빠릿 미리 일을 했고 너저분하게 쌓인 캐비닛들의 서류들을 카테고리별로 정리하고 문구용품들도 쓰기 편하게 각 맞춰 정리해 두었다. 이제 막 시작한 작은 회사 대부분이 그렇듯 이것저것 회사의 잡무들도 직원들이 나눠서 해야 했다. 출장이 잦은 사장님은 새벽이나 밤늦게 비행기 시간을 조정하려고 전화를 할 때도 많았다. 지혜는 단 한 번도 그 일들이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점점 많아져 야근도 잦아지자 회사 분들은 8시만 넘어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라고 하고 영수증을 챙겨 오라고 했다.
회사 주변에 유명한 맛집들도 꽤 있었는데 야근 없는 날이면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며, 막내는 돈 쓰는 거 아니라는 말과 함께 매번 돌아가면서 밥을 사줬다. 가끔 지혜가
"매번 얻어먹어서 어쩌죠? 담엔 제가 한 번 살게요"
라고 하면,
"지혜 씨가 상사가 되면 그때 후배들 많이 사줘요. 상사는 그러려고 돈 조금 더 받는 거예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지혜는 후임이 생긴 이후부터 지금까지 후배 직원들에게 똑같이 말하며, 급여의 일정 금액은 후배들에게 밥이나 커피를 사주는 본인만의 예산으로 책정해 두고 사용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지혜는 좋은 어른들, 좋은 상사들이 어떤지 첫 회사에서 배우게 되었다.
지혜는 회사가 너무 좋았다. 사장님도 직원들을 배려하면서 함께 성장해 가기를 약속했다. 이전 회사부터 같이 일했다는 두 명의 여직원은 결혼하고 출산 후 일주일에 두 번씩만 회사에 나왔다. 출근하는 날도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을 했다. 워킹맘은 힘들다며 사장님이 배려해 주신 덕분이었다. 명절이면 사장님은 외부 손님들도 중요하지만 직원들이 더 중요하다면서 좋은 선물들을 직원들의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먼저 보냈다. 사장님이 매각하신 이전 회사에서는 크리스마스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서 직원들 집에 하나씩 보내고, 송년회는 직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할 수 있도록 큰 장소를 빌리고 송년회에 입고 올 옷을 사라며 직원들 모두에게 돈을 줬다고 했다. 모든 직원들이 회사를, 사장님을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