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계약서는 언제나 통보이다

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by 하우주

이틀 전 오후 업무 중에 띠링, 소리를 끄지 않은 직원들의 컴퓨터에서 메일 알람이 울렸다. 동시에 지혜의 컴퓨터 오른쪽 하단에도 알림이 떴다. 경영지원팀에서 보낸 연봉계약서 메일이었다. 메일에는 올해 연봉 계약을 진행한다는 간단한 내용과 함께 연봉 계약서, 비밀유지 계약서 등 몇 개의 파일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지혜는 연봉 계약서를 열어보았다. 연봉은 작년과 동일했다, 동결이었다. 오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 회사에 그런 기대가 없었기에 지혜는 아무 감정 없이 메일을 닫았다가 어제 출근 후에 첨부파일을 하나씩 열어 출력을 하고 사인을 해서 경영지원팀 팀장에게 가지고 가 제출을 했다.

"연봉계약서 여기 두면 되죠?"

"네"

면담을 신청해 온 직원들이 많다며 경영지원팀장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바쁘시겠네요, 수고하세요."

‘뻔하겠지.. 또 승진한 사람들 찔끔 올려주고 나머지는 다들 동결이겠지.‘

의미도 없는 인사를 하고 지혜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일했던 부서의 H과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차장님, 연봉 계약서 받으셨어요?'

'네, 받았어요. 사인해서 냈어요. 동결이더라고요, 기대도 안 했어요.'

'차장님.. 저.. 연봉 삭감 당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한 달치 월급 넘는 금액이 깎여서 왔습니다.'

'정말요? 경영지원팀에 얘기해 봤어요? 왜 삭감이 됐을까요? 그럴 일이 있나요?'

'경영지원팀장한테 물어봤는데, 팀 실적 달성 못 한 것 때문에 좀 깎이고, 인사평가 점수가 안 좋아서 또 깎였다고 하더라고요.'

'팀 실적 달성 못 한 걸 왜 H과장 연봉에서 까요? 이번에 부서장급들은 전부 동결이라고 들었는데?'

'부서장들은 다 동결이고, 팀원들 한 명씩 인사고과 D 맞은 사람들이 다 때려 맞은 것 같아요.'

'아니, 말도 안 되지.. 팀 실적 못 채운 팀장은 동결이고 팀원이 그걸 다 감당해요? 처자식 있는 사람 연봉을 그렇게나 깎으면 어떻게 해요?'

'휴.. 모르겠습니다. 집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직을 알아봐야 할지..'


지혜는 당황스러웠다. 작년 회사의 매출은 전년 대비 더 높았다. 작년 연초에 목표한 매출은 아니었지만(목표 매출 자체가 근거도 없이 그저 대표를 잠시나마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던가) 어쨌건 역성장은 아니었다.그러나 작년 상반기에 비해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한 작년 하반기부터 경영진들은 회사가 어렵다며 직원들을 쪼아댔다. 해가 바뀌자 회사는 대대적으로 올 한 해가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며, 부서별로 대응 방안을 내놓으라, 어떻게 위기 극복을 할지 개인별로 아이디어를 내놓아라, 비용 절감 방안을 내놓으라는 둥 하루가 멀다 하고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사내 게시판에 공지 글이 올라오고 뭘 하는지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원가절감 팀에서 부서별로 찾아와 업무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매출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자 운영이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회사 대출이 많았거나, 부지니 공장이니 투자가 많았거나,회사의 운영이 아닌 곳으로 돈이 흘러들어 갔거나.. 어찌 되었건 결론은 경영진이 지난 일 년의 살림살이를 잘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연초부터 직원들을 달달 볶는다는 것은 올 한 해도 비슷한 양상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직원들 연봉을 삭감해? 회사 매출이 감소한 것도 아닌데? 지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상하다, 특이하다, 다른 곳이랑 다르다..라는 말들로 아무리 포장을 해도 이건 그냥 나쁜 거였다. 살림은 본인들이 잘못해 놓고,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연봉은 그냥 두고 말단 직원들한테 실적 안 좋은 책임을 묻다니. 그럴 거면 왜 부서를 책임지는 부.서.장 혹은 팀.장 이라는 직책을 맡기는 거지? 권리는 있고 의무는 없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지혜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매출이 유지되는 회사에서도 연봉 삭감이라는 것은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역성장도 아니고 순성장을 한 회사가 연봉을 깎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인사 고과도 부서장 마음대로였다. 기준도, 제대로 된 평가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인사 평가 결과를 가지고 연봉을 삭감하다니.. 만약 지혜가 부서 이동 없이 그 부서에 그대로 있었다면 분명히 지혜를 싫어하는 부서장인 J이사가 인사평가를 나쁘게 주고 지혜 또한 연봉 삭감 대상자가 됐을 터였다. 작년 초 이미 J부서장은 예고하지 않았던가, ‘김차장 인사고과는 내가 평가해요 ‘라고..


오랜만에 블라인드 앱의 회사 게시판은 시끌시끌했다. 새로운 정리해고 방법이냐, 이전에도 한 번 썼던 방법으로 재미 보더니 또 같은 짓을 한다 등등.. 설상가상으로 연봉이 동결되어 사인을 안 하고 면담을 하겠다는 직원들에게 경영지원팀 총괄 임원은 사인을 안 할 거면 사직서를 들고 면담 신청을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렇게까지 회사가 나쁠 수 있다고? 이건 나쁜 걸 넘어 사악한 수준이었다.


월급쟁이들에게 한 달 월급, 1년 치 연봉은 그냥 돈이 아니었다. 삶의 기반이고 목숨줄이었다. 가족이 있으면 더했다. 그런 월급을, 이렇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삭감한다는 것이, 그런 결정을 하는 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지혜는 자괴감이 들었다. 월급에 매여 회사가 어떤 부당한 대우를 해도 참고 견뎌야 하는 현실, 직원에게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회사에서 월급 주니까 좀 깎아도 시키는 대로 하던가, 꼬우면 나가던가'라며 오히려 으름장을 놓는 회사라니..


그동안 지혜도 여러 회사를 다녔지만, 이 정도로 나빴던 곳은 없었다. 사람 목숨줄 가지고 장난치고 협박하는 이런 비열한 짓을 하는 곳은 없었다. 지혜는 지난 회사들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까지 나쁜 회사가 또 있었던가.. 각 회사들마다 이상한 점은 있었고 못 견디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문득 지혜는 회사 초기에는 직원들을 많이 아꼈던, 그래서 직원들이 회사에 오는 걸 즐거워하고, 회사 대표님을 좋아했던 첫 직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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