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회사에서는 팀장이 없어진 지혜의 팀과 W부장의 팀을 하나로 통합했다. 3명의 팀원 중 한 명은 출산휴가를 갔고 두 명밖에 남지 않으니 별도의 팀이 의미가 없었다. W부장은 두 팀을 총괄하게 되면서 이사로 승진했고 이사가 된 이후 더욱 대표를 쥐락펴락 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는, 회사의 나름 큰 일을 정리하는데 조용히 차분하게 지원한 지혜를 이전보다 더 신임하는 듯 보였다. 기존에 하던 신규 프로젝트도 지혜에게 완전히 다 맡기고, 회사에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따로 불러서 "김대리 생각은 어때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마녀의 괴롭힘이 조금씩 심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확연하게 남들 눈에 띄게 드러내놓고 지혜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상사로서 업무적인 괴롭힘이라면 지혜도 '그래도 저 사람이 나보다 잘하는 것이 있으려니, 배우는 단계이거니'하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녀의 괴롭힘과 따돌림은 회사 내 직원이 아닌 같은 여자로서의 시기와 질투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사사건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거나 짜증,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이어졌다.
지혜가 준비한 PPT의 애니메이션이 맘에 들지 않다라거나, 지혜의 의견에 내용과 무관하게 꼬투리를 잡는다거나, 지혜가 하고 있는 업무들이 많다는 핑계로 새로운 업무들은 무조건 배제하는 식이었다. 업무와 상관없는 언행들도 수시로 내뱉었다. 수술하지 않은 지혜의 쌍꺼풀이 마녀의 심기를 거슬리기도 했고, 때론 특별하지도 않은 수수한 옷차림을 마음에 안 들어하기도 했다. 보통의 여초 회사들에서는 여직원들끼리 서로 견제하기도 하는 일이 보통이었지만, 마녀라는 워낙 큰 공공의 적이 있다 보니 다른 여직원들끼리는 오히려 잘 지내는 편이었다.
고객사와 미팅을 하기 위해 대표와 마녀와 같이 외근을 하게 된 어느 날, 마녀가 대표의 벤츠 자동차를 운전하고 지혜가 보조석에 앉고 대표가 뒤에 앉아 있었다. 운전을 하지 못하던 지혜에게 대표는
"김대리는 아직 운전 못한댔죠? 운전도 좀 배워야지?"
라고 말을 건넸다
"예, 면허는 있는데 장롱면허라 아직 운전은 못합니다. 얼른 배워서 빠른 시일 내에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윗분들을 모시고 가며, 상사가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송구스러워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앙칼진 W이사의 대답이 돌아왔다.
"빨리 배운다 한들, 네가 벤츠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니?"
"아... 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지혜는 말문이 막혔다. 상황이 재미있는지 뒤에서 웃는 대표와, 대표의 웃음에 기분이 풀린 듯한 마녀의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지혜는 고객사로 가는 차 안의 그 분위기가 묘하게 불쾌했다.
그 뒤로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표와 마녀와 해외 출장도 같이 가게 되었고, 언제나 매번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술을 즐겨하는 마녀는 출장 중에도 식사 때마다 가벼운 와인 한 잔이라도 하지 않으면 성질을 내기가 일쑤였고, 대표의 행동 하나하나에 간섭하고 참견하며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 마녀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르는 대표를 보며 지혜는 같이 출장을 간 연구소의 동갑내기 직원과 한 발자국 뒤에서 서로 멋쩍게 눈웃음을 건넬 뿐이었다.
지혜가 보기에 마녀의 장점도 있었다. 그 의도와 목적은 추측만 할 뿐이었으나 정말 진심으로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열심히 했다. 회사의 오너에게, 그렇게 일해주는 직원(?)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일 듯했다. 그러나 본인의 부족한 실력도 본인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일 잘하는 직원들을 심하게 견제했고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새로 입사한 해외파 차장에게는 열등감이 폭발했다.
그 무엇보다도, 해외 전시회를 참가하는 데 같이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부스에 오는 남자 고객들에게 드러나게 스킨십을 하며 제품 설명인지 뭔지 모르겠는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지혜는 당혹스러웠다. 부스를 방문하는 모든 남자 고객들이 '이 회사 직원들은 이렇구나."라는 생각을 할 것 같고 같은 회사라는 이유로 싸잡아 비슷하게 싸구려 취급을 당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천박하다는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하는 거였다.
퇴근 시간이 되면 대표와 십 분씩 간격을 두고 서로 눈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것도 지혜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개인들의 사생활까지 뭐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지혜와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국내의 대형 고객사가 초대한 팀 저녁 식사 자리에 노란색 레깅스 위에 짧은 치마를 입고, 수술을 했다는 소문이 있던 풍만한 가슴골을 그대로 드러낸 상의에, 늘 신던 10센티는 되어 보이는 통굽 샌들의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나타난 W이사를 보고 지혜는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고상하고 우아하기까지 바라진 않았다. 다만 최소한의 품위 정도는 지켜주길 바랐다. 고객사와 업무적으로,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만들어지고 있는 지혜의 프로젝트에 똥물 한 바가지를 끼얹은 듯한 느낌이었다.
지혜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 중에는 글로벌 기업, 국내 대기업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이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 마녀는 그조차도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업무적으로는 트집을 잡힐 일이 없었기에 지혜는
‘아무리 바빠도 도와달라고 안 하고 과로로 쓰러지더라도 알아서 할 테니 제발 재만 뿌리지 마라'
라는 심정으로 맡은 일들을 해 나갔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 마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 P사를 만나러 간 미국 출장길에 일정이 맞아 파트너사 담당자와 함께 간 메이저 리그 야구장에서, 마녀는 LA다저스를 상대로 이긴 홈팀의 들뜬 분위기에 취해, 술에도 취해 아내와 함께 온 파트너사 담당자를 껴안고 맥주를 엎지르는 등, 미국에서조차 주목받는 특별한 옷차림과 함께 여러 가지 튀는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찌 보면 시대를 앞서간 패션이었다. 10년 전에 이미 시중에서 사기 어려워 댄스복으로나 살 수 있는 초록색, 노란색 레깅스를 입고 다녔으니 말이다. 출장길에서의 부끄러움은 동행한 동료들의 몫이었고, 이후의 출장 일정에서도 본인만 즐거웠으니 그쯤 하면 좋으련만, 한국으로 돌아와 진행하는 파트너와의 업무 커뮤니케이션도 수시로 끼어들어 컨퍼런스콜이나 메일 상으로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으니, 프로젝트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부하직원이면 일을 안 시키면 되겠지만 상사의 경우 참 곤란스럽다. 또 이런 상사는 굳이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다. 적극적이고 열심히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면 또 알아듣지를 못한다. 말릴 수도 없고 이야기를 할 수도 없어 난처하다. 업무적인 면에서 마녀가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른 직원들이 몇 배는 더 잘하고 있었다. 본인의 고집을 부리며 왜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냐고 팀원들을 돌아가며 불러 괴롭혔지만, 팀 내에는 마녀보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는, 마녀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이 열심히 일했던 걸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해 갔다.
지혜는 W이사의 견제 때문에 괴로웠다. 마녀만 아니면 사실 크게 회사에 불만은 없었다. 하루는 출장 일정 때문에 지혜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에서 묵고 같이 다음 날 새벽 비행기를 타기로 한, 이제는 같은 팀이 된 모 과장이 같이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아주 가깝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업무적으로만 지내는 직장 동료들에게 있어 가장 편한 대화의 주제가 직장 상사 험담일 것이다.
"김대리 마녀 때문에 힘들지?"
"다들 힘들잖아요 ㅎㅎ"
"업무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대표님이 김대리 챙긴다면서 엄청 질투하고 괜히 꼬투리 잡고 괴롭히는 거 다들 알아."
"다들 알만큼 티 나게 괴롭히긴 하죠 ㅎㅎㅎ"
"참.. 이런 얘기까진 그렇지만, 마녀가 김대리가 대표님 스타일이라는 얘기까지도 하더라. 미친년이야."
"참 나.. 정말 미친년이네요..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저렴해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살면서, 사람이 품위 있게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지혜는 마녀를 보며 깨달았다.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품위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을 일컫는다. 품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행동에, 말투에, 쓰는 언어에 모두 드러난다. 첫 회사의 부사장이 그랬듯이, 두 번째 회사의 마녀가 그랬듯이 품위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빈수레처럼 가벼웠고 진중하지 못했고 권위를 내세웠지만 존경은커녕 하찮았다. 그건 명품을 휘감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먹는다고 생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품위 있게 나이를 먹고, 늙어가야겠구나.. 지혜는 두 번째 회사에서 품위 있게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회사에서 2년을 채워갈 때쯤, 지혜는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농담처럼, 받고 있던 연봉의 1.5배 이상을 주면 가겠노라고 이야기하는 지혜에게, 회사는 원하는 조건을 제시해 주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회사와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는 것, 상상만 했던 일이 지혜에게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