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스카웃을 제안해 온 회사는 지방에 있었다. 지혜는 근무 중에 첫 번째 회사의 해외 법인에서 근무했던 S이사의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늘 통화나 메일로만 업무를 주고받다가 한국에 출장으로 들어오면 사무실에서 서너 번 업무를 처리하고 직원들 다 같이 회식을 하며 짧은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S이사는 이직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며, 들어온 지 두 달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친분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혜에게 첫 회사의 인연은 특별하기에 그저 반갑기만 했다. S이사 역시 첫 번째 회사의 회장님 한 분만 믿고,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필리핀 법인으로 건너가 사업 초기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던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랬던 분이 이직을 하셨다는 걸 보면,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은가 보다 지혜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S이사는 이직한 회사에서 신사업을 맡게 되었다면서 같이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조건은 제시해 주면 회사와 이야기해 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 지금 연봉 1.5배 주시면 지방으로 갈 생각도 있습니다, 이사님 하하"
지혜는 웃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했다. 설마 지방에서 대리급한테, 그것도 여직원한테 이 연봉을 맞춰주겠어?라는 마음이었다.
S이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김대리 원하는 연봉이랑 조건 알려줄래요? 가급적 맞추도록 회사랑 얘기해 볼게요. 여긴 지금 좀 급하거든, 회사 내에서 할만한 사람도 없고 해 본 사람도 없고. 지방이라 인력 구하기도 쉽지 않고"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지혜는 1.5배 연봉과 지방에서 지내야 할 개인 숙소 제공을 제안했고, 회사에서는 연봉과 개인 숙소 월세의 절반을 내주겠다고 했다. 굳이 또 절반은 뭐야 싶었지만 금액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연봉이 높은 편이니까 그럭저럭 이 정도면 괜찮은 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건도 중요하지만, 일욕심이 많은 지혜로서는 해외 사업들을 이제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고 이와 관련된 업무들은 PM으로 다 맡기겠다는 회장님의 이야기에도 혹했다.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혜를 위해 토요일에 회장님이 직접 면접을 보러 나오겠다고 했고, 회장님 면접 외 다른 부서와의 면접은 없을 거라고 했다.
토요일 KTX를 타고 내려가 회장님 면접을 보고, 주말에 오느라 고생했다며 차비를 받고,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오고 배웅을 해 준 S이사와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서울로 올라왔다. 두 달 후 예정된 신사업 설명회 준비를 위해 입사를 서둘러 달라고 하여 지혜는 주말을 보내고 다음 월요일에 바로 마녀에게 면담 신청을 하고 퇴사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퇴사한다고? 왜에? "
"다른 곳에서 이직 제안을 받아서요. 괜찮은 조건이라 이직하려고 합니다. "
"제뉘퍼 맡고 있는 프로젝트들 많은데.. 인수인계 잘해 줄거지?"
"네, 그럼요"
"알았어, 내가 대표님한테 얘기할게. 일단 기다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는 등, 예의상으로도 한 번 잡지도 않았다. 2년간 해 온 일이 있고, 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데도, 잡거나 아쉬워하기는커녕 마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왠지 신나 보이는 모습으로 대표 방으로 예의 그 덜그럭거리는 힐 소리를 내며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마녀에게 전화가 왔다.
"제뉘퍼~ 대표님 방으로 와 볼래?"
"예"
대표의 오른쪽 옆에는 언제나처럼 마녀가 앉아 있었다.
"김대리 그만둔다고요?"
"예, 대표님.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데, 여기서 좀 더 오래 다니면서 회사랑 같이 성장하면 좋잖아"
잔뜩 서운한 표정의 대표 옆에 마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대표님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분 때문에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지혜의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몇 번을 더 얘기하다가 지혜의 의지가 확고해 보였는지 대표는 지혜에게 알았다며, 마무리 잘해서 넘기라며 대화를 끝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마녀는 방을 나가는 지혜의 뒤에 대고 또 콧소리를 내며 대표에게 말했다.
"거보세요~ 저 말고 믿을 사람 없다고 했잖아요~~ 다들 키워놓으면 나간다니깐~~"
2주간 지혜는 매일 늦게 퇴근을 하며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했다. 엑셀로 모든 내용들을 정리해 두고 누가 와서 봐도 바로 알 수 있고 찾을 수 있도록 파일과 폴더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출근 날이었던 월요일 아침, 대표는 전체 직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회사인데, 키워놓으니 나가는 직원들이 있다면서, 그럴 직원들은 빨리빨리 그만두고 나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누가 봐도 지혜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맞다, 회사는 성장할 수 있었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특허들만 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회사였다. 지혜도 그 점이 아까웠다.
그러나.. 마녀가 언제까지 회사의 안주인 노릇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의 관계로 보아, 회사에서 들리는 소문들로 보아 마녀는 절대 회사를 떠날 것 같지 않았다. 대놓고 지혜를 저격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억울하기도 했다. 정말 회사를 이직하려는 이유도 모르면서 이렇게 대놓고 무안을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침 전체 회의가 끝나자 대표와 마녀는 다시 대표 방으로 들어갔고,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하나씩 둘씩 지혜에게 와 인사를 했다.
"지혜 대리, 고생만 하고 가네, U부장 때문에 별 일 다 겪고 마녀 때문에 또 맘고생 많이 하고, 아침에 저런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해 주는 따뜻한 말들과 위로 덕에 지혜는 겨우 속상하고 섭섭했던 마음을 다시 추슬렀다. 그리고 퇴근 전 대표 방으로 가 노크를 했다. 2년 동안 지혜를 믿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대표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 대표가 좋아한다는 [신의 물방울]에 나왔던 '샤토 몽페라' 와인을 주말에 사 두었었다.
"대표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직은 하지만 회사 계속 잘 성장하길 바라겠습니다."
엉거주춤 와인을 받아 들며 대표는
"그.. 그래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 표정에 아침에 했던 행동에 대한 미안함이 살짝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람 일이 어찌 될지 몰라 좋게 좋게 끝낸다지만, 돌고 도는 인간관계를 차치하고라도 지혜는 마지막은 가급적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너무 추하지 않게, 차마 상대의 안녕을 빌어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도 있었지’하며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딱 그 정도만..
Goodbye에 왜 Good이 붙어 있을까, 그냥 bye가 아니라 Good+bye인 이유는 헤어짐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그 상황 앞에서 상대에 대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지키자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새롭게 많은 일들을 하고, 또 별별 일들을 겪었던 두 번째 회사의 생활도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지혜는 다음 날 기숙사 짐을 정리하고 그 다음날 바로 세 번째 회사가 있는 도시로 짐을 옮겼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몰려왔다. 지혜 본인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심지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좋은 조건으로 가는 것이니, 평소 자신이 말했듯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라 생각하며 좋은 마음만 가지고 가자고 지혜는 여러 감정들로 복잡한 마음을 다독였다. '고마웠어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