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지혜는 부서를 옮겨 본사에서 진행하던 신사업 업무들을 계속했다. 누구도 건드는 사람이 없어 일하기는 편했지만, 진행되고 있는 이 신사업들이 과연 정말 잘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계속 커져만 갔다.
중소기업들이 상장을 하고 주가가 오르면서 시총이 커지고 회사에 돈이 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여기저기에서 오너에게 투자해라, 좋은 아이템이 있다, 대박 날 수 있는 사업이 있다.. 등등의 유혹이 들어온다.
바닥에서부터 사업을 일구어내고 사업을 성공시킨 자수성가형 오너일수록, 본인이 이루어낸 성과에 자부심을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많은 경우 자아가 팽창되고, 본인만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변하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그 와중에 욕심이 과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틈을 노려 칭찬과 아부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온갖 종류의 사기꾼들을, 이미 욕심에 눈이 먼 오너는 혜안을 가지고 걸러내지 못한다. 옆에서 아무리 뜯어말리고 바른 소리를 해도 '사업도 모르는 것들이 하는 말'로 치부될 뿐이다.
지혜가 처음 일했던 신사업을 포함하여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은, 누군가가 이 사업이 정말 될지, 시장성은 있는지, 실현 가능한 기술인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은 있는지 조사하거나 검토한 사업은 하나도 없었다. 운이 좋게 처음 진행한 사업은 계열사로 분리되고 그 덕에 본사의 주식도 많이 올랐지만, 그 외의 사업들은 그렇지 못했다. 신사업 10개 중에 2-3개 될 것이라 생각하고 추진한다지만, 잘 된다더라, 떼돈을 번다더라 등 카더라의 얘기만 믿고 추진하는 사업들은 백이면 백, 다 실패한다고 보면 된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회장이 말만 듣고 가지고 와 해보라고 한 사업들은 결과가 좋지 않거나, 사업 파트너들이 흐지부지 사라지면서 성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어떻게든 되게 해 보려고 애쓰고 매달렸다. 그도 안 되면 회사가 손해보지 않는 방향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지혜는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걸까..
날이 갈수록 회장의 태도는 변해갔다. 회장이 시키는 일이 대해 직원들이 제대로 된 일인지, 사기는 아닌지 조사라도 해보겠다고 하면 니들이 뭔데 시키는 것만 할 것이지 토를 다냐고 성질을 낸 이후론 다른 임원들도 나서지 않았다. 한 번은 딱 봐도 사기꾼인 사람들이 내미는 계약서 내용이 하도 말도 안 돼서 지혜가 이 내용을 제대로 보낸 것이 맞냐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했다가 불려 가 욕을 먹기도 했다.
"니가 뭔데 구질구질하게 그 사람한테 그런 걸 물어봐? 내가 오케이 하면 끝나는 거지"
안하무인. 고집불통.. '교만하지 않게, 오만하지 않게.' 어느 정도의 자리에 오른 오너들에게 아마도 가장 어려운 것이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진행하던 신사업들이 하나씩 둘씩 정리가 되고, 조용하던 회사엔 뜬금없이 소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계약내용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 증명, 투자했던 해외 법인의 근무자들이 단체로 노동부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장 등등.. 종류도 다양했지만 회장은 우기고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별로 하는 것 없는 변호사 놈들에게 왜 그렇게 돈을 많이 줘야 하냐며 버럭버럭 화를 내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신사업들이 정리가 되어가자 지혜가 할 일도 점점 없어졌다. 다른 부서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회장이 허락을 해야 옮길 수 있었다. 회장은 다른 부서로 보낼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고, 업무와 아무 관련들도 없는 개인적인 일들을 시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조카 하나가 그림을 잘 그린다며, 전시회를 열어주고 싶다며 알아보라고 했다. 지혜는 서울에 올라가 인사동에 있는 개인 전시 장소들을 알아보고 작품 수에 맞춰, 동선에 맞춰 가장 알맞은 장소를 섭외하고, 전시회 홍보 준비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고 전시회가 끝나는 날까지 전시회장을 지켰다.
조카의 전시회가 끝나자 이번에는 다른 조카가 미국의 공군 전문학교에 가고 싶어 하니 그 학교를 알아보라고 했다. 지금처럼 sns 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구글을 뒤져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봤지만 한인커뮤니티조차 없는 미국 작은 시골의 학교에 대한 정보를 다 알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뒤지고 뒤져 한 장 정도 정보들을 취합하여 회장에게 보고하였지만 회장은 왜 이것밖에 못 찾았냐고 역정을 냈다.
‘학교 조사하러 미국 출장이라도 가야 하나 ㅎㅎ'
그렇게 회장 집안의 집사 아닌 집사처럼 심부름들만 시키더니 하루는 회장의 동생인 재무팀 부장이 조용히 지혜를 불렀다.
"김과장, 대출을 받아서 회사 주식을 좀 사는 게 어때요? 대출은 은행에 얘기해서 낮은 금리로 받을 수 있게 할 거고 이자는 회사에서 내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저의는 알 수 없으나 정도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 남동생 결혼식 때문에 제가 대출을 좀 받아야 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침 남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지혜는 그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둘만 있던 조용한 회의실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잔뜩 일그러진 회장 동생의 표정을 보며 지혜는 서늘함을 느꼈다. 회장의 집안에 끝까지 충성을 할지에 대한 테스트에서 탈락했다는 무언의 통보를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회장이 지혜를 방으로 불렀다. 회장은 뜬금업이 지혜와 동갑인 타 부서의 P과장 이야기를 꺼냈다.
"둘이 동갑인데 연봉이 천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나거든. 회사 형평성도 있고 하니까 연봉을 깎아서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제 연봉을 깎으라는 말씀이실까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화가 났다.
"둘이 동갑인데 연봉 차이가 너무 나잖아"
회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여기 올 때 약속하신 연봉이고, 그 연봉에서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나이 때문에 연봉이 같아야 해서 제 연봉을 깎아야 한다면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그 말까지 하고,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지혜를 내쫓을 방법을 찾느라 지난 한 달간 고민을 한 듯했다.
이제 써먹을 만큼 써먹었나.. 서글펐다. 정작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부서로 이동은 안 시키더니 본인이 사람들 말에 속아 벌려놓은 온갖 일들 뒤처리까지 다 하고 집사마냥, 흥신소마냥 집안일까지 다 하고 나니까 이제 소용없다는 것인가. 이제 와 뜬금없는 연봉 타령을 하며 직원을 내쫓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정도의 회사에 난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걸까.
지혜는 태연한 척 회장 방을 나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에 와 앉았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고르고, 물을 한 잔 마시고, 그렁그렁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사직서를 전산으로 올렸다. 억울하고 분했다.
지혜의 마지막 출근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회장에게도 예의상 인사를 하러 올라갔다.
"너가 연봉을 깎는다고 했다면 내가 널 다르게 봤을 텐데. 아쉽네. 나가서도 잘하고."
고마웠다, 수고했다 말 한마디가 없었다.
"제가 연봉을 깎고 남기로 했다면, 제가 저 자신을 다르게 봤을 것 같습니다."
지혜 또한 감사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회장방을 돌아 나오며 끝내 눈물을 뚝하고 흘리며 지혜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내가 나를 잃지는 말자, 내가 나 자신을 지키자"
그렇게 지혜는 세 번째 회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