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다른 곳으로의 이직을 알아볼 새도 없이 또다시 백수가 되었지만, 월급을 못 받는 건 회사를 다니나 안 다니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성장만을 생각한다면, 일을 배우는 걸 생각한다면 월급을 못 받아도 계속 다니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지혜는 잠시 했다. 일을 배우는 것도, 하는 것도 재미있고 좋았으니까.
그러나 한 달살이인 월급쟁이 직장인들에게 월급이란, 많고 적음을 떠나 그냥 '돈'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라고 지혜는 생각했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수 있게, 비루하지 않게, 초라하지 않게 먹고살 만큼의 돈을 받는다는 것이 회사라는 곳을 다니는 전제 조건이 아닐까. 워라밸도 성장도, 좋은 직장동료들도.. 기본 전제는 월급이 나온다는 것 아닐까, 그것이 회사가 직원에게 마땅히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대표나 이사가 조금의 미안한 기색이라도 내비쳤다면 지혜는 면역력이 떨어져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상황에서도 아마 회사에 머물렀을 터였다.
다행히 지혜는 세 달 만에 세 번째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분의 소개로 경기도에 위치한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제조업 기반의 회사는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신사업 부문을 꾸려 사람들을 채용 중이었다. 운이 좋게도 옛 동료가 잘 이야기해 준 덕에 지혜는 이전보다 높은 연봉으로 신사업 PM(Project Manager)을 맡아 일하게 되었다. 첫해는 동분서주 장기적으로 매출을 일으킬 수 있을만한 사업들을 찾아보고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들을 반복하였다. 지혜는 기존에 해보지 않았던 영역의 사업들을 하나씩 공부해 가며 다시 일에 매달렸다. 무궁무진하고 새롭고 다양한 제조업의 영역들과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 하나하나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들이 지혜는 늘 재미있었다. 그래서 지혜는 제조업이 좋았다. 그렇게 부지런히 찾고, 예비 고객사들을 찾아다니기를 1년을 하고 나서야 한 프로젝트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1년 정도가 걸렸다는 건 신사업 기준으로는 빠른 편이었다. 회사의 오너 혹은 대표가 어느 정도의 자금과 시간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고 확률 또한 반반이었다.
신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전무님이 이전에 다녔던 대기업에서 지혜의 팀이 제안한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1년 정도 장기 프로젝트로 계획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전무님은 대표에게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설득하기를 반복했다. 고객사에서 적극적으로 같이 해보자고 한 사업이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서, 자신들이 출시하고 있는 주요 신제품에 제안한 기술을 활용하겠다고 하니, 신규 프로젝트가 안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혜는 모든 것이 별 탈 없이 잘 흘러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해 초, Covid-19 팬데믹이 시작되었지만, 팬데믹과 상관없이 프로젝트는 진행될 예정이었다. 회사에서 준비를 서둘러야 했지만, 대표는 무슨 이유인지 차일피일 준비를 미루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고 준비를 미루던 대표는, 갑자기 마스크 사업을 하겠다며 지혜네 팀의 프로젝트를 천천히 준비하자고 했다. 팬데믹이 시작된 지 10개월이 흐른 뒤였다. 이미 마스크는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다는 뉴스들이 나오고 있었고, 마스크를 만들어 팔며 재미를 본 중국 기업들은 오히려 마스크 제조 장비들을 중고로 팔고 사업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끝물인 마스크 사업을 하겠다며 고객사가 빨리 하자고 조르는 프로젝트를 미루겠다고?
전무님의 설득에도 꿈쩍 않으며 시간만 까먹으며 정. 말.로. 중국에서 중고 설비를 사 와 공장 한 켠을 채워 마스크를 제조하여 팔겠다던 대표는 고객사에서 해당 기술을 채택하겠다는 D-day 6개월을 남겨놓고서, 고객사에서 우르르 회사를 찾아오자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표는 시간이 짧아도 다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정말로 6개월 만에 가능한가요?"
고객사에서 계속 물었다. 전무님과 지혜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러나 대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제가 보증합니다, 가능해요. 이 기술 다 해봤던 거예요. 별 거 아닙니다"
확답을 했던 대표와 다르게 실무 부서에서는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다. 지혜는 본사에 들를 때마다 사비로 음료수며 간식을 사다 바치며 진행 상황을 살폈다. 어렵게 다시 취직한 회사, 그리고 믿고 맡겨준 사업부 전무님. 지혜는 프로젝트를 꼭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회사 일이 지혜의 마음처럼 돌아가진 않았다. 시간은 부족했고, 구매팀의 팀장으로 있는 대표의 아들은 기술을 구현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자재 발주를 넣지 않았다. 구매를 서둘러야 한다고 설득하고 빌다시피 하고 화를 내도, 구매팀장이신 2세님은 '내 맘에 안 들면 프로젝트에 필요한 물품들 발주 안 낼 거야'라는 식의 말을 수시로 내뱉으며 몽니를 부리곤 했다. 고객사가 와서 미팅을 해도 동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고객사 담당자들은 구매팀장이 왜 미팅에 들어오는지를 궁금해했다가, 그의 태도에 놀라워했다가, 대표의 아들이라는 말에 납득을 하기도 했다.
본인의 몫이 될 회사를 직원들이 키워주겠다는데도, 망나니 2세는 눈에 뻔히 보이는 열등감을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회사를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별 말을 하지 못하는 대표 또한 아무 생각 없는 것이 분명했다.
시간은 흐르고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지만 기술을 구현할 장비는 제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고객사에게 사정하여 시간을 더 벌었지만 장비는 고객사에서 요구한 5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불량을 만들었다. 고객사 한 곳만 연관되어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고객사와 그 계열사, 그리고 최종 제품을 납품하기로 한 공급업체까지 세 개의 회사가 기술을 활용한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를 돌려 테스트를 하는 사용한 공급업체의 제품값만 해도 1억이 넘는다고 했다. 결국, 처음 기술을 활용하겠다고 한 최종 고객사에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하고 2-3개월을 30명이 넘는 각 회사 담당자들이 모여 밤을 새우고 주말마다 나오고 어떻게든 해결을 해 보려 노력했지만 끝내 기술은 구현되지 않았다. 최종 고객사에서 제품에 사용하기 위해 주문하고 만들었던 장비 전량을 구매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프로젝트는 끝났고, 훗날 듣기로는 당시 구매했던 장비들은 불용재고로 남아 그룹 내에 큰 이슈가 되었다고 했다.
결국 회사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마스크 사업도 망하고 신사업 부서도 정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반짝하고 2년이 지나갔다. 고객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도 안 되는 사업이 있더라, 성공 여부를 떠나 정말 간절하게 바라면서 일에 미쳐 있으니 아무리 피곤해도 피곤한 줄 모르겠더라. 세상 일이 참.. 내 맘 같지 않더라... 지혜는 여러 가지를 보고 겪고 깨달았다. 신사업 총괄을 맡으셨던 전무님은 사표를 내셨고 지혜는 일단 회사에 남기로 했다. 이것저것 마무리를 할 것들도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또다시 마음 졸이며 구직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이유들로 인해 회사의 기존 사업들도 매출이 줄고 있었고, 여기저기 손을 대기만 하면 망하기만 하는 '마이너스의 손'인 대표 덕에, 회사는 보유하고 있던 건물들을 판다, 만다 말이 많았다. 불과 2-3년 전 사업이 조금 나아지면서 여러 명목으로 사 들인 아파트와 건물들 매입금의 이자를 갚느라 회사는 현금이 없다고 했다. 망나니 2세는 구매팀뿐 아니라 여기저기 간섭과 참견을 일삼으며 날로 발전하는 갑질 스킬을 시전 중이었다. 그즈음, 이전에 같이 일했던 선배 하나가 이직 생각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지혜는 냉큼 이직하고 싶다고 답을 했고, 그렇게 지혜는, 지금 다니는 여섯 번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