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잔 중소기업 이야기
블라인드 평점 1.X, 잡플래닛 평점 1.X. 그나마 회사에서 관리를 한 덕분에(?) 이 점수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블라인드나 잡플래닛 평점 2.0 이하인 곳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 아님'으로 정의를 한다. 지혜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 한 두 달이 지나서야 조금 친해진 주변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블라인드에 가입을 했다. 회사의 점수를 보고, 퇴사자와 현직자들의 리뷰를 읽고, 실시간 올라오는 현직자들의 글들을 읽었다. 이 모든 내용들을 미리 읽었으면 좋으련만..
면접을 직접 본 회장에 대한 쎄했던 느낌은 입사 후 회사의 분위기와도 비슷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마치 무덤같이 적막했다. 지혜가 일하는 사무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팀이 한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어 인원이 좀 있는 편인데도, 아침에 출근을 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면 사무실에 앉아 있는 직원들 몇 명이 겨우 고개를 들어 고개만 까딱하거나, 들리지도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지혜의 나이도 어느덧 마흔, 회사 생활도 이미 10년이 훌쩍 넘었기에 사무실 분위기만 봐도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팀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감이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혜는 아침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팀장인 J 이사는 출장 중이거나, 안 나오는 날이 많았기에 몇 명 있는 팀원들끼리 잘 지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용히 모니터만 보고 있다가 점심때 스르륵 사라지는 팀원들에게 지혜는 같이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회사 식당이 아닌 밖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조용조용, 말이 없는 친구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저 여태껏 얘기할 사람들이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입사 후 2달이 지난 후 있었던 '사건' 이후, 마치 이전에 마녀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잘 지냈듯이, 걱정해 주며 마음 써 준 팀원들과 지혜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전쟁터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듯이, 공공의 적이 존재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관계는 오히려 끈끈해지는 법이다.
화려한 평점에 걸맞게 회사 생활은 다사다난했다. 특히 J 이사가 팀장으로 있는 지혜의 팀은 블라인드에도 올라올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입사한 직원들이 들어왔다가 별의별 이유로 나가고 다시 충원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J이사 본인의 입으로 말했듯 이 회사에 입사한 직후 '운이 좋아서', '어쩌다 얻어걸린' 모 고객사와의 ‘크지는 않으나 의미 있는 거래’ 이후 회장은 J 이사를 무조건적으로 신임하고 있었고 덕분에 J이사는 빡빡한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내고 있었다.
매주 한 번 모든 부서장들이 들어가는 전체 회의도 들어가지 않았고 - 이유는 간단했다,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 회사 전체적으로 진행한다는 부서별 원가 절감 아이디어도 내지 않았다. 근태 또한 자기 맘대로였다. 술 먹고 지각을 하거나, 아예 안 나오거나, 가끔 내키면 카톡으로 팀 단톡방에 몸이 안 좋아서 천천히 나가겠다는 톡을 남겼다. 물론, 누구도 대답을 하진 않았다. 매일매일 근태 확인을 하는 회사의 행태를 생각하면, 회장님이나 대표님 친척이냐는 말이 돌 정도로 출퇴근이 마음대로였다. 모든 임원들이 잠시만 외출해도 일일이 보고하라는 회장의 지시가 무색하게 J이사 한 명만큼은 천하무적이었다 회장을 비롯한 몇몇 임원들은 늦게 퇴근을 하는 직원들이 열심히 하는 직원이라는 시대 역행적인 마인드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출근을 한 날은 언제나 늦은 퇴근으로 생색을 내며, J이사는 본인이 회사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렇게 자유롭게 회사를 다니면서도 본인이 스스로 자랑하고 다닌 높은 연봉과, 다른 팀장들과는 다르게 아랫 직원들에게는 한 푼도 나눠주지 않고 혼자 챙긴, 본인 말로는 얼마 안 되는 성과급과 코스닥 공시에서 확인된 회사로부터 받은 주식은 J이사에 대한 회장의 신뢰를 반증했다. 회장의 평가는 이랬다. '조직 관리는 못하지만 영어도 잘하고 밖에 나가서 회사 소개를 영어로 하는 사람이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모르겠으나 영어를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몬영어 수준인 J이사의 영어 실력과, 고객사이건 파트너이건 회의 자리에서 무례함으로 일관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거의 매번 파트너사는 담당자를 바꿔 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
어떻게 회장이 모를까 싶을 정도로, J이사를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람들을 대할 때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회의 자리에서 담배를 피기도 했으며,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온라인 회의를 할 때는 고객사가 보건 말건 게임을 하거나 정기적인 회의에도 본인 마음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너무 당연한 결과였지만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성과가 날 리가 없었다. J이사가 잘하는 건, 몇 개의 자료들을 모아 PPT를 만들어 고객사에서 언급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장밋빛 미래를 본인 스스로 계획하여(심지어 고객사를 만난 적 조차 없을 때에도) 회장과 사장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욕심이 화를 부르고 일을 그르치듯이, 1,2년 안에 몇 백억, 몇 천억 매출을 하겠다는 J이사의 '스토리텔링'은 매번 먹혔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 J이사를 보며, 스토리텔링=거짓말의 공식이 성립될 수 있음을, 전략과 사기는 한 끗 차이임을 지혜는 깨달았다.
‘어쩌다 얻어걸린’ 첫 번째 성과 이후 그는 몇 년째 업무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고, 회사의 분위기에 맞게 팀원들을 탓했다. 그러나 정작 팀원들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할 만큼 의미 없는 출장을 포함하여 모든 출장을 J이사는 혼자 갔다. 출장 전 출장 계획서도, 다녀와서 출장 보고서도 없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출장길에 S사장이 종종 동행했다. 직원들은 이야기했다. J이사는 카톡 프사를 찍으러 출장을 가고, S사장은 비행기 비즈니스 마일리지를 쌓기 위해 출장을 간다고. 딱 한 번 한 팀원이 J이사와 S사장과 동행한 출장길에, 팀원은 에어비앤비에 묵으며 라면을 끓인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중요한 미팅에는 그저 들러리였고 숙소에 돌아와 라면을 끓이라고 하여 라면을 끓여 갖다 바치면, 라면을 더럽게 맛없게 끓인다는 타박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 출장 이후 그 팀원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팀원들의 퇴사와 입사에 따라 드라마처럼 시즌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팀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상황들이 어떻든 간에, J이사가 이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회장의 욕심과 S사장의 무능력이었다. 결국 모든 책임은 최종 결정권자가 지는 것이다. 이 이상한 회사는, 회사가 잘 되면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잘한 것이고, 회사가 안 되면 모든 것이 직원들 때문이었다. 노오력을 하지 않는, 회사가 어려운데 불만이 많은, 위기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없는 직원들 탓이었다.
능력이 없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은 사람들, 회사에서 어떤 부당한 짓을 해도 크게 반발하지 않는 착한 사람들, 혹은 적당히 일하며 적당히 놀다가 월급만 받아가면 된다는 소위 월급 루팡들이 회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임원들이 하는 일이라곤 회장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회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흔하디 흔한 중소기업의 모습, 그중에서 조금, 아주 조금 더 범상치 않은 이곳을 지혜는 이미 일 년 이상 다니고 있다. 불합리한 회사의 결정들과, ‘뭣이 중헌디’를 백번씩, 천 번씩 속으로 외치게 만드는 이상하다 못해 모자라 보이는 불필요한 절차들과 거기에 더해 S사장의 괴롭힘까지.. 지혜는 개콘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라는 X콘이라는 이야기를 직원들과 하며, 시시때때로 호흡을 어렵게 만드는 담배 냄새와 싸워가며, 돌아가는 꼴을 보며 속이 꽉 막힌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서둘러 도망치듯 퇴근을 서두르며.. 지혜는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