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지혜는 옥상 화단에 있었다. 매주 화요일 아침, S사장이 주관하는 전체 부서장 회의가 끝나면 지혜는 거의 매번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월요일보다 더 싫은 화요일을 매주 맞으며, 지혜는 옥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담배 냄새는 따라다니며 지혜를 괴롭히고 언제나 매번 불쾌했지만, 저렇게 담배를 피우면서 한숨도 내쉬고 모여서 험담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난 다음 다시 또 콩알만큼의 버틸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마련한 후 사람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혜는 에어팟을 끼고 유튜브를 열어 자주 듣던 Eminem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고 최대 볼륨으로 높였다. Lose yourself를 다 듣고 killshot을 다 듣고서도 지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회의 시간마다 지혜는 S사장의 괴롭힘의 타겟이었고, 지혜가 만든 자료를 보며 지혜에게 시비인지, 충고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하느라 회의 시간이 길어지는 일도 잦았다.
애초에 지혜가 들어갈 회의도 아니었다. 전체 부서를 총괄하는 J이사가 회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J이사는 출장이 잦다, 바쁘다는 핑계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S사장은 J이사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지혜에게 대신 회의를 들어오라고 했다. 부서 아래 3 개의 팀의 자료들을 취합하여 뭐가 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출근 다음 날 처음 회의에 들어갔다. 부서의 정확한 내용을 다 아는 팀원들도 없었다.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위치만, 직위만 부서장이지, J이사는 자신이 총괄하는 팀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고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3군데 팀의 예상 매출 자료들을 모아 엑셀에 있던 숫자 자료들을 복사하여 ppt에 붙이면 소수점 숫자가 틀어지면서 전체 숫자가 안 맞았다. 왜 숫자가 안 맞냐, 타 부서에 업무 협조 요청하는 게 없냐, 정말 없는 거냐 김차장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냐.. 모든 부서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업무가 아닌 인신공격적인 이야기가 계속될 때면 지혜도 가끔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대꾸를 하기도 했다.
‘어른에 대한 예의’, 첨엔 그리 생각해 별말 없이 그냥 들었다. 나이 지긋한 모든 부서장들이 함께 있는 회의였다. 그 자리에서 대들면, 다른 직원들 앞에서 S사장에게 화를 내며 대들고 짜증을 내는 J이사와 다를 게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한 선이라는 게 있었다. 조롱과 비아냥이 난무할 때면 지혜도 그대로 있기는 힘들었다.
지혜가 좀 회의에 익숙해지자 S사장은 뜬금없이 지혜에게 회의 서기를 하라고 했다. 명목은 차부장급이 회의 정리하는 걸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지혜를 비롯한 다른 부서장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또 김차장 괴롭히려고 저러네"
S사장이 지혜를 유독 괴롭히는 걸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회의 서기를 시키고는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또 회의 정리 자료를 가지고 하나하나 무안을 주며 괴롭혔다. 칸을 몇 칸을 띄워라, 가운데 줄을 그어라.. 한 주 한 주가 지날수록 괴롭힘이 계속되고 집요해졌고 주변 부서장들이 지혜에게 회의 중간중간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힘내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냥 그러려니 해요"
회의가 끝나고 나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하기도 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 어색한 웃음에 지혜는 잔뜩 긴장되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듯도 했다..
마음이 울렁일 때마다, 그래서 위와 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 때마다 듣던 명상음악으로는 지금의 정신 상태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혜는 주변 소리가 모두 차단되는 답답한 느낌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이건 무엇이건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회사로 온 이후로 에어팟은 필수품이 되었다. 옥상으로 올라와서도 필요했지만 사무실에서도 에어팟은 꼭 필요했다. 지혜뿐 아니라 모든 팀원들이 그랬다. snl에서 보는 맑눈광 아영이처럼 집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J이사가 사무실에 있을 때 만들어내는 모든 소음을 피하기 위해 모든 팀원들이 에어팟이나 버즈를 사용해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하늘은 맑았다. 지혜는 사무실에서 입는 카디건을 다시 여미며 앉아 한참 눈을 감고 Eminem의 Stan 이 나오자 천천히 눈을 떠 옥상에서 보이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겨울을 보낸 나무들의 색색의 새잎들 색깔로 화려하진 않지만 소담하니 아름다웠다. 중간중간 듬성듬성 보이는 꽃들을 보니 봄이 오긴 오는 모양이었다. 지혜는 전체적으로 파스텔톤인 봄의 산 풍경이 너무 좋았다, 지혜는 그 풍경을 봄단풍이라 마음대로 지어 불렀다.
문득, 작년에도 이렇게 이뻤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입사한지 벌써 6개월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울을 비내고 봄을 여기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잠시 비워졌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토요일 그렇게 전화를 끊고 S사장은 전화로 성이 안 찼는지 베트남 법인장과 단톡방을 열었다. 지혜의 설명은 다 무시하고, S사장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며 베트남 법인장에게 화를 냈다.
"어떻게든 출하 일정에 다시 맞추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쉽게 하면 말아먹습니다. 김지혜 차장 직무 유기입니다, 우리는 고객 지향적인 조직입니다"
아.. 고객 지향적인 조직이 이렇게 시시각각 본인 편한 대로 정의가 되는 거구나. 고객 지향적인 조직이 품질 문제 생겨도 해결도 안 하고, 고객이 골든 위크 휴가 기간이니 차라리 늦게 보내달라고 해도 무시하고, 본인 매출 실적 내서 회장한테 욕먹기 싫으니 고객한테 무조건 물건 가져가라 하는 것이 고객지향적인 조직이군요.. 지혜는 단톡방에 쓰고 퇴사해 버릴까 생각도 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지혜는 S사장에게 가 다시 보고를 했다. S사장은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지혜의 보고를 들었다. 토요일처럼 막말을 하진 않았지만, 또다시 회사생활이 어떻고 라떼는 어땠고 한참 잔소리가 이어졌다. 베트남에서 방법을 찾아본댔으니 그렇게 알고 고객사랑 얘기하라. 김차장이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안 된다고 해도 무조건 해 달라고 제조 쪽에 졸라라, 그러면 다 된다. 그 몇 마디 결론을 듣기 위해 지혜는 50분을 S사장의 방 테이블에 S사장이 피우는 전자담배 냄새를 고스란히 맡으며 앉아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방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임원들.. 임원들의 방은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는 장소였다. J이사도 출근을 하면 곧장 S사장의 방으로 담배를 피우러 갔다. Manners makes man.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사람들.. 얼마 전 회사 직원이 회사에서 전자담배를 피웠다며 인사위원회가 열리고 징계를 내린다는 둥 난리였으나, 그건 일반 직원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이 회사에서 임원들의 방은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방법도 없이 무조건 맞춘다던 베트남 법인장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궁금했던 지혜는 월요일 출근해서 답을 들었다. 적. 당. 히 검사 자료를 만들어서 일단 주고 제품은 보내자.. 그랬다. 적당한 눈속임으로 윗사람들한테 적당히 둘러대고 적당히 일을 무마하고. 그래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도록 그냥 넘어갈 수 있도록 적당히..
그러나 깐깐한 일본 고객사는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제품을 먼저 보내겠다고, 품질 검사가 다 끝났노라고 하자, 그게 가능하냐고 묻던 고객사는 검사 자료를 먼저 보내달라고 하더니 엑셀 빼곡한 그 검사 자료를 밤새 일일이 확인한 모양인지 데이터 오류들을 집어내 화요일 7시에 메일을 보내왔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검사자료 조작해서 보내지 말고, 제대로 검사해서 출하 일정 늦춰서 보내달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지혜는 부끄러웠다. 자료를 조작하다가 고객사에게 들통이 나다니..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지혜와 팀원의 몫이었다. 주말 내내 베트남에서 직원들 특근시켜 한 짓이 고작 자료 조작이었다.
화요일 회의 시작 전, 지혜는 미리 S사장에게 보고를 했다. 베트남에서 검사 자료를 허위로 만들어서 보냈고 고객사가 그것을 확인했다, 출하 일정을 연기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메일이 왔다.. 역시나 S사장은 부끄러움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라던 S사장은 화요일 회의 시간, 다시 지혜를 비난했다. 적극적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고객이 해 달라는 대로 하면 회사 다 말아먹는다, 부디 책임 의식을 좀 가져라..
수치심은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가장 마지막 감정이자, 고유한 감정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인간다운 판단을 배제하고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마도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나 보다고 지혜는 생각했다. S사장의 소시오패스적인 행동은 이후로도 지속되었고 동시에 J이사의 사이코패스 같은 행태들과 시너지를 일으켜 때론 너무 황당해서 웃기기도 하고 때론 너무 사악해서 질려 버릴 것 같았다.
그 아침 지혜는 눈에 봄단풍을 가득 담으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이렇게 원치 않는 곳에서, 이렇게 나쁜 인간들의 바닥을 보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을 위해, 본인의 삶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기 위해, 지혜는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를 가져야겠다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