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입사를 한 지 6개월이 지나, 지혜는 갑자기 팀이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J이사가 부서장으로 있는 같은 부서 내에서의 팀 변경이긴 했지만 그간 J이사가 S사장을 비롯한 다른 임원들에게 지혜가 필드영업 경험이 없다며 말하고 다니며 지혜를 '일 못하는 직원'으로 평가했다는 건 지혜도 건너 건너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J이사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일일이 대꾸할 일도 아니었다. 다른 능력은 몰라도 잔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을 것이었다. 어차피 인간에게 있어 정말 객관적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이 본인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걸 알기에 지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믿게 마련이라는 걸,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지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업무적으로만 건들지 않았음 했다.
J이사는 겉으로는 지혜에게 편하게 일하라며, 하고 싶은 영업을 하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수시로 지혜의 팀원을 데려다가 잡무를 시키는 적이 많았고, 지혜가 시장조사를 열심히 해 전략을 짜고 이런 방향으로 해 보겠다고 하면, 뜬금없이 회사 제품이 어려워서 그건 안 된다는 말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지혜의 자료만 가져다가 슬쩍 자기 자료에 써먹기도 했다. 부서장이 이런저런 핑계들을 대며 지혜가 하려고 하는 일들을 건건이 못하게 하니 지혜의 팀은 성과는커녕 시작하려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S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전시회를 한 번 나가보는 것이 어떠냐는 지혜의 제안에 S사장은, 큰 전시회 다 다녀봤지만 볼 게 없더라, 지금은 전시회를 나갈 상황이 아니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수시로 출장을 나가는 S사장과 J이사는 전시회나 출장을 가기 전에도, 돌아온 후에도 보고서 하나, 누굴 만났다는 이야길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보안사항'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핑계로 어떤 이야기도 공유되지 않았다. 어쩌다 J이사와 한 번 전시회를 같이 갔다는 타 부서 직원의 이야기로는 전시회에 잠시 갔다가 휙 둘러보고는 별 거 없다며 호텔로 돌아간 이후 전시회를 다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출장기간은 5일이었지만 누구도 간섭하지 않으니 또 카톡 프사에 찍을 사진이나 찍으러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지혜와 팀원들은 뭔가를 해 볼만한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구글링을 하고 cold mail(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보내는 홍보 메일)을 보내거나 시장조사를 하며 다른 제품들을 팔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작정하고 일을 못하게 하는 사장과 직속 상사를 이길 방법은 없어 보였다.
S사장은 글로벌 대기업이 아니면 영업을 하지 말라며 지혜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두 번이나 반려하기도 했다. 작은 고객들은 연락하지 말고 매출 1조 넘는 큰 기업들 영업만 해라, 회사 돈 없으니 전시회는 안 된다, 알아서 적극적으로 회사들에게 연락해 봐라...
두 번째로 사업계획서를 반려당한 날, 지혜는 사장을 찾아가 물었다.
"100억 매출하는 회사에서 100억 성과를 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것도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S사장은 지혜의 팀은 왜 매출이 없냐고 부서장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도 했고, 매출 계획을 맞춘 달에는 '박수라도 쳐 주라'며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언행을 일삼았다. 그런데 100억 하는 회사들은 작은 회사이니 아예 연락조차 하지 말라니..
지혜의 첫 입사날, 저녁으로 소고기를 사주며,
"김차장, 내년 매출은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후년부터 매출을 만들 수 있게 기반을 잘 만들어주세요. 회사 나가지 말고요"
라고 했던 본인 스스로 했던 이야기를 S사장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상기된 얼굴로 사장실로 들어와 이야기하는 지혜 때문에 S사장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뗀 S사장의 대답에 지혜는 뚜껑이 열린다는 표현을 알 것 같았다.
"100억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매출은 올리세요. 그렇지만 100억을 해도 매출 1조 넘는 큰 기업에 판 거 아니면 성과로는 쳐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천하에 김차장이 그런 구멍가게들 상대해서 되겠습니까?"
지금 회사는 매출 1조가 되어서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 부품을 구매해 주고 상대해 주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매출 0원에서 1조가 되는 기업은 없다. S사장의 말은 그저 말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지금 말이야 막걸리야!!!!!!!" 라며 소리를 빽 지르는 본인을 상상하며, 지혜는 '알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고 등을 돌려 사장실을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이 반복되며 뭔가를 하려고 시도해도 번번이 부딪히자 지혜도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뭔가를 더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업무도 많지 않았다. 새로 맡게 된 업무는 J이사가 영업을 잘할 수 있게(?) 시장조사를 하여 자료를 만들고 전략을 짜고 기획을 해 주는 업무였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잠시 짜증이 났지만, 직접 매출을 만드는 팀이 아니기에 부서장 회의나 영업회의를 들어갈 일도 없고 S사장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일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혜는 그동안에도 적당히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 시장조사를 핑계 삼아 해외시장 트렌드를 보거나 관심 있는 제품 분석 자료들을 보고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팀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데리고 있던 팀원들도 J이사 밑으로 가게 되었다. 혼자 하던 일을 좀 더 보기 좋게 자료로 만들어 공유해 주면 그뿐이었다. 지혜가 분석하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지혜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동안 만들었던 자료들도,
"이야~ 자료 좋다~" 라며 슬쩍 자기 자료에 가져다 쓰는 것 빼고 J이사는 지혜의 자료를 자세히 보지 않았다.
내 일만 하고 월급값만 하자. 지혜는 당장 퇴사도 어려우니 지금의 상황을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지혜는 업무 속도가 빨랐고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수첩에 적힌 업무를 빨간 볼펜으로 긋고 다음 업무를 하는 것이 좋았다. 성격이었다. 화장품이나 샴푸 같은 것들도 쓰다가 다른 걸 쓰는 것이 어려웠다. 공병을 버린 후에야 다른 걸 새로 뜯어 썼다.
회사에서는 한 시간에 끝날 일도 몇 시간씩 오래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지혜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지혜는 웬만하면 일을 다음 날로 미루지 않았다. 첫 회사 때부터 같이 일했던 분들은 지혜에게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지혜 씨, 우리에겐 내일이 있어.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일하지 마.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퇴근하자 그만"
지금 회사는 업무량이 많지도 않았고, 비효율적으로 업무를 하는 곳이기에, 지혜는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회사를 떠나 이직을 하거나, 경제적 자유를 위한 준비를 차근히, 차분히 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눈치는 보였지만 정시 퇴근도 가능해서 워라밸도 지킬 수 있었다. 회사에서 겪거나 지켜보거나 듣는 여러 일들로 여전히 분노하고, 짜증도 나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회사는 바뀌지 않을 것이었기에 스스로의 감정 소모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걸 꾸준히 읽던 자기 계발서들을 통해 배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기 계발서를 읽게 된 것도 회사 덕분이었다.
마이클 A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의 한 단락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당신이 거기에 가슴을 닫을 만큼
중요한 일이 되도록 버려두지 마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그날의 즐거움이 되게 하라 “
라는 말처럼, 스스로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스스로의 가슴을 닫지 않기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피식 웃으며 넘기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지혜는 얼마나 더 오래 다닐지 모르는 회사 생활을 그렇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