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부서가 바뀌고 또 6개월이 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 일 없이 조용히 회사 생활을 이어나가던 지혜는 다시 부서 이동 통보를 받았다. 그 사이 지혜는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 행복할지, 무엇을 잘하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고민했다. 자기 계발 서적들도 읽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에 이력서도 넣어 이직 시도도 하고,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창업을 할 기회가 있다고 연락을 받으면 열심히 알아보기도 했다. 성과는 없었고, 지혜는 계속 회사에 남아야 했지만 무작정 아무 준비도 없이 퇴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 나이 마흔 하나, 아주 탁월한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대한민국 중소기업에서 이직이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회사는 여전히 매일 새롭고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졌다. 일들이 생기거나 누군가 겪은 일들을 전해 들을 때마다 '반응이 아닌 대응을 하자'라고 지혜는 매번 생각해지만 쉽진 않았다. 분노하고, 웃고, 놀라는 다양한 그러나 대부분은 부정적인 감정들로 채워지는 날들이 많았지만 지혜는 조용히, 잠잠히 생각하고 조금씩 준비해 나가겠다 생각하며 입사 1년을 넘기고 있었다.
능력이 출중하다고 회장에게 인정받은 J이사는 1년 동안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실 그전에도 성과는 없었다. 지혜의 입사 전후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J이사의 성과란 입사 첫해 회장을 감동시킨 첫 제품 판매 성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이후 몇 년간은 좋게 보면 계획이고 나쁘게 보면 사기인 핑크빛 전망을 담은 ppt 자료로만 끝났다. J이사가 특출 난 성과를 낸 것이 있긴 했다. 아마도 영업을 하면서 '태도'의 문제로 여러 고객사에 담당자를 바꿔 달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은 유일무이한 직원이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J이사는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를 팀원들 탓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 핑계로 본인이 데리고 있기 편한 직원들만 남기겠다는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남자 직원들만 남기고 지혜를 포함한 여직원 두 명을 다른 팀으로 보내 버렸다. 지혜는 그룹 전략실로 부서 이동이 결정되었다.
J이사는 형식적으로 빈 회의실로 지혜를 불러 부서 이동을 통보하며 얘기했다.
"김차장 괜찮죠? 기획하고 전략 짜고 그런 거 잘하니까."
지혜는 아무렇지 않았다.
"네, 괜찮습니다"
간단히 대답하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부서로 가더라도 시장 조사는 좀 해줘, 김차장 자료 좋잖아"
지혜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멋쩍게 웃으며 회의실을 나와 낮게 중얼거렸다.
"미친.. 돌+I+shake it..."
며칠 후 공식적으로 부서가 바뀌고 자리를 이동하기 전, 외국계 회사에서 정년 퇴임을 하고 두 달 전에 회사에 합류했다는, 지혜의 상사가 될 전무님과 공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거창할 것도 없었다. 팀에는 전무님과 지혜 둘 뿐이었다. 전무님은 본인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 거라고 설명하고는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다.
"왜.. 여길 오셨습니까? 다니시던 곳과 분위기가 많이 다를 텐데요"
지혜의 질문에 전무님은 눈을 똥그랗게 뜨시더니 다시 지혜에게 질문했다.
"대한민국 중소기업들이 다 이렇습니까? 지난 두 달 동안 저는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아직도 대한민국에 이런 회사들이 있다는 게 너무 놀랍네요."
왜 굳이, 평생 잘 나가는 외국계 회사에서 존중받고 대우받으며 즐겁게 일하셨다면서 여길 오셨을까. 지혜는 마치 해외여행을 갔다가 어글리 코리안 취급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회사'에 1년 넘게 있는 직원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는 생각에 지혜는 얼굴이 굳어졌다.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만, 중소기업 대부분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고, 이 회사가 그중에 유난히 특히 좀 특이한 편이긴 합니다."
그동안 이야기를 하실 상대가 없었는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넘어 있었다. 전무님은 대화를 끝내며 지혜에게 이야기했다.
"저야 정년퇴직하고 와서 재능기부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김차장님은 저랑 같이 즐겁게 일하고 경력 잘 만들어 보세요. 저는 참 좋은 회사에 다녔었거든요. 좋은 회사들도 많아요. 같이 일하는 동안 즐겁게 합시다."
좋은 분이었다.
훗날 전무님께 들었지만, 지혜에 대한 윗분들의 인식이 너무 안 좋고 일을 못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만약 그 이야기들이 사실과 다르다면 본인이 그 인식을 바꿔버리겠다고 생각하셨다 했다. 아마도 밀려오는 업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일하게 된 직원에 대한 소문이 안 좋아서 처음엔 염려도 많으셨을 거라 지혜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아니라 직접 겪어본 후 판단하겠다고 하시며 지혜를 객관적으로 보아주고 전적으로 신뢰해 준 전무님께 지혜는 참 감사했다. 그리고 6개월 정도가 지나자 회장을 비롯한 고집쟁이 윗분들의 인식은 바뀐 듯했다.
타인들의 평가에 따라 지혜의 가치가 변하지는 않지만, 지혜 스스로가 그것에 크게 개의치는 않지만 아마도 일을 못한다는 윗분들의 평가가 계속 있었다면 지혜는 다른 직원들처럼 '개인사유로 인한 퇴사'를 당하며 회사 생활을 마무리해야 했을 것이다. 지혜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부서 이동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지혜는 출근길에 친하게 지내는 다른 팀 차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 아침 고객과 함께 베트남 공장에 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공항에서 뭔가 부탁할 일이 있나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곰차장님~ 공항이십니까~"
"아니요, 저 공항 갔다가 고객한테 인사하고 돌아가는 중이에요"
"네? 무슨 얘기예요?"
"아침에 공항 가는 길에, S사장이 출장 신청서 반려해서 부서장이 돌아오라고 전화 왔어요. 고객한테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길이예요. 고객사 분이 '반려했어요? 저랑 같이 가는 건데 회사에서 반려했어요? 회사 너무 하네요'라고 하는데요.. 차장님 저 너무 쪽팔려서요. 그리고 현타 오더라고요. 아 여긴 정말 아니구나 싶어서요. 저 이대로 돌아가서 사표 내려고요."
이야기인즉슨, 제품에 문제가 생겨 고객사와 급히 베트남 제조라인에 가기로 하고 부서장과 이야기가 다 되어 출장 이틀 전 출장 신청 결재를 올리고 급히 출장 준비를 하였는데 부서장이 S사장에게 보고도 안 하고, 결재도 안 하고 늑장을 부리다가 S사장이 뒤늦게 이미 공항으로 출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출장 신청을 반려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고객사는 혼자 회사 제조공장으로 갔고 곰차장은 회사로 복귀해야 했다. 제조업체에게 중요한 고객과 중요하지 않은 고객이 있을까만은, 추후 진행될 프로젝트를 예상해서는 회사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한 고객사였다. S사장의 이런 고객에 대한 태도 덕에, 고객들 사이에서는
"그 회사는 일 주기 전에는 간이고 쓸개고 빼 줄 듯하다가, 정작 일 주고 나면 태도가 완전히 바뀌더라고요"
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언제나 말로만 고객 중심이었다. S사장에게 고객은 그저 '성과 내서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주는 곳' 그 정도인 모양이었다. 고객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태도는 J이사와 S사장이 참으로 잘 맞는 듯 보였다.
곰차장은 결국 그 일을 계기로 회사를 떠났다. 능력 있는 직원인지라 찾는 회사들이 많았고 곧 새 직장도 구하고 본인 일도 했다. 능력 있는 직원들 내보내고 고인 물들 만 남게 하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그즈음, 곰차장의 퇴사를 시작으로 해가 바뀌어 가는 시기부터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퇴사 러시가 시작되었다.
전년보다 매출액이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영업이익은 마이너스였다. 경영진들의 잘못된 투자에 대한 결과였다. 그러나 회사는 의사결정을 최종 결정권자들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고 반성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하기는커녕, 적자인 이유가 모두 열심히 하지 않은 직원들 탓이라며 부서별로 모아놓고 자아비판을 하라고 하는 둥, 직원들 각자가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끝장토론을 하자는 둥 난리법석이었다.
새해를 맞기 전부터 작성과 수정을 반복한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들들 볶아댔다. 영업직들은 현실성이 없더라도 일단 무조건 매출 목표를 높게 잡아야 했고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그 소질이 없는 직원들은 몇 번씩 다시 불려 가 사업계획서를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허황된 목표 추구는 다른 부서들도 비슷한 듯했다. 예를 들면 경영지원팀의 KPI 중 하나는 '블라인드'나 '잡플래닛' 평점을 올리는 거였다. 지혜가 보았을 때 이 회사 경영지원팀의 문제는 본인들이 '지원'이 아니라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직원들이 업무를 잘할 수 있게 '지원'을 해 주는 것이라 직원들이 '정신 차리고 일에 몰두할 수 있게' '관리'하고 그렇지 못한 직원들을 내보낼 수 있게 '감시'하는 부서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통제받는 사람들이 어떤 업무를 제대로 할까? 통제받는 사람들은 잔소리 듣지 않을 만큼만, 통제하는 사람들의 눈에 벗어나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행동할 뿐이다. '생존'을 위해 일할 뿐, '성장'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최선의 결과가 아닌 최악의 결과를 가까스로 피한 결과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라며 불러대는 것에 질린 직원들, 회사가 어렵다며 연봉은 동결 혹은 삭감인 것에 불만을 가진 직원들, 수시로 경비 절감을 하라며 직원들에게 개인별로 방안을 내라며 괴롭히는 거나 에어컨이나 난방, 온수 등 기본적인 근무 환경조차 지켜주지 않는 이유들 등.. 여러 가지 이유들로 수십 명의 직원들이 퇴사했고 퇴사를 하고 있고 퇴사를 준비 중이었다.
경비 절감을 하라고 몇 천 원짜리 문구용품 하나 사는 것도 일일이 결재를 올리고, 그 결재를 또 온갖 핑계를 대가며 반려하여 직원들을 경악하게 하면서도, 여전히 임원들은 각자 사무실에서 여름에는 에어컨을 켠 채로, 겨울에는 난방을 켠 채로 언제나 창문을 열어놓고 전자담배들을 피워대는 걸 보며 지혜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블라인드나 잡플래닛 평점이 낮은지에 대한 고민은 없이, 가끔 들어가 '관리'하고 누가 그런 글을 썼는지 찾아서 경고를 준다고 민심이 달라질까?
지혜가 40년 인생에서, 15년의 사회라는 곳에서 배운 건 '진심은 통한다'가 아니라 '진심만 통한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