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의 이유는 이미 정해져 있다

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by 하우주

지혜는 주말이면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온몸에 기력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주말에 몰아서 잠을 자고 나면 그나마 다시 조금 살 것 같았다. 연애 초반, 회사 일이 바빠지면 집 밖을 나가려 하지 않는 지혜 때문에 남자친구는 불만이 많았다. 평일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주말에도 근교라도 나가려고 하면 큰 맘을 먹어야 하는 지혜와,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는 여러 면에서 잘 안 맞았다. 연애 기간이 3년이 넘어가자 함께 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생활을 하는 게 더 편해졌다. 남자친구가 혼자 취미를 즐기는 것에 대해 지혜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회사 일로 바쁠 때면 지혜는 주말에는 자다가 배가 고프면 일어나 대충 요기를 하고 조금 힘이 있으면 청소나 집 정리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누워 있으면 또 스르륵 잠이 왔다. 가끔 좋아하는 영화들이 개봉을 하면 같이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전부인 오래된 연인이었다. 회사와 집안일 말고 딱히 하는 것 없이 단조로운 생활들이 이어졌다. 뭔가 변화를 주고도 싶었지만 바닥난 체력은 회복되질 않았다. 그전 회사에서 어떻게 그렇게 일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신기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마음의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 몸은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런 지혜가 마음먹고 오랜만에 주말에 남자친구와 근교에 나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토요일이었다. 물먹은 이불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모처럼의 데이트에 지혜도 남자친구도 조금은 들떠 있었다. 열심히 뒤져 옆 동네의 유명한 브런치 카페를 찾아 예약을 하고, 브런치를 먹고 난 후에는 호수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다. 아직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걷기에 괜찮을 날씨였다.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어, 남자친구가 지혜를 픽업하고 출발하려고 차에 막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S사장이었다.


주말에 전화라니, 예전 같았으면 일하는데 주말이 어디 따로 있나라고 생각하는 지혜였지만 이 회사에 온 이후로는 달랐다. 사람들이 말하는 워라밸을 지키고 싶었다. 그조차 지키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 것 같았다. 사사건건 말도 안 되는 걸 트집 잡아 괴롭히는 S사장의 전화라면 더욱 그랬다. S사장의 전화임을 확인하자마자 지혜는 기분이 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색할 순 없었다.

"네 사장님"

"김차장 이거 뭡니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일본 S사 거 납품 왜 미뤄진 겁니까"


베트남의 생산 법인에서 제품을 만들고 난 후 전 수량을 검사하여 고객사로 보내야 하는데 품질 검사기 두 대 중에 하나가 고장이 나서 고치느라 한 대로만 진행이 된다고 하였다. 검사기를 고치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검사 한 번에 드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밤을 새도 예정 일정보다 일주일 정도 연기가 된다는 설명을 담당 팀원에게 들었었다. 워낙 까다롭고 꼼꼼한 일본 고객인 데다, 품질 불량으로 벌써 몇 번이나 불만이 접수된 곳이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고객사에서도 아직 제품 재고가 남아 있어 급하지 않으니 빨리 보내는 것보다 품질 문제없이 꼼꼼히 검사 잘해서 보내달라고 한 건이었다.


지혜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주 회의 시간에 이미 보고했던 건이라는 말 또한 덧붙였다. 그러나 S사장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김차장, 지금 직무유기한 겁니다. 무조건 보내야지 무슨 소립니까?"

"베트남 라인, 품질팀 전부 확인했고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해서 고객사에 미리 알렸고 고객사에서 기존에도 품질 문제들이 빈번히 발생하니 품질 검사만큼은 제대로 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베트남에 어떻게든 해 보라고 했어요?"

"했습니다, 그런데 품질 문제 때문에 고객사에서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고, 베트남에서도 밤새워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지혜와 팀원으로서는 충분히 해 볼만큼 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결과였다. S사장의 말은 잠시 멈춘 듯하더니 다시 이어졌다.

"... 그렇다고 매출 펑크내고 다음 달로 넘기고 사업 말아먹습니까? 김차장 이거 직무유기예요"


순간적으로 담배 냄새가 차 안을 가득 메우며 호흡이 어려워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고 평온하게 대처하려던 지혜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전화기를 던져 버리고 싶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사업을 말아먹다니요.. 사장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정적이 흘렀다. 지혜 또한 S사장이 하려는 모든 말을 참고 들을 순 없었다. 지난주 회의 시간에는 별말 없이 넘어가더니, 월말이 되어 또 매출이 부족하니 그냥 쪼는 건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 대상이 필요했던 걸까.


".... 월요일에 정리해서 구두 보고하세요"

통화는 종료되었고 출발을 하지 않고 있던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친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기를 끄는 지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아........"

"사장이야?"

"응..."

"왜 또..."

"... 출발하자"

"괜찮겠어?'

"괜찮진 않지. 근데 다른 방법이 있나 그냥 괴롭히는 건데.."




피해자에게 폭력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직접적인 고통을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괴롭힘의 이유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유를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피해자는 괴롭힘을 피할 수 없다. 가해자가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이상 변하는 건 없었고 가해자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끝나지도 않는다. 괴롭힘의 직접적인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와 인간적으로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인해 피해자는 조금씩 병들어 간다. 가끔 출근길에 그날의 일들이 예상되는 아침이면, 특히 회의가 있는 아침에 지혜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죽어야 이게 끝나려나'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가, '이런 나쁜 인간 때문에 내가 왜 죽어 억울하게'라고 혼자 중얼거렸다가, 출근을 하는 이 순간들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면 또 기분 나쁜 담배 냄새들로 호흡이 가빠지곤 했다.




토요일 아침의 전화 한 통은, 즐겁고 평온하게 행복했을 주말을 망쳐 버렸다. 한 번 가라앉은 기분은 잘 회복이 되지 않았고 지혜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웠다. S사장의 크고 작은 괴롭힘은 1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었지만, 그 일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건 직무유기이니 사업을 말아먹느니 하는 막말 때문이었다. 사회 생활한 지 15년 가까이 되도록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회사가 아닌 나의 최선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사업을 말아먹는다는 말을 들을 만큼 큰 실수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일을 잘못 이끌고 간 적이 있었던가.


지혜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직할 때와 연봉 협상할 때는 나를 위한 최선을 구한다, 그 외 모든 경우는 아무리 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도 회사를 위한 최선을 구한다.

그게 지혜가 받는 월급값이라 생각했다. "밥값은 해야지"라는 말이 사람들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지혜는 진심으로 이직과 연봉 협상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회사를 위한 최선을 구했고 그것이 지혜가 하는 밥값이었다. 그건 지혜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뱉은 단어들은 지혜를 무능하고 성실하지 못하며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속되는 괴롭힘으로 지혜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자존감도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지혜는 회사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이직조차 쉽지 않은 본인의 무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나쁘고 나쁜 사람들이 있기에 미워하고 경멸할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이 지혜에게 최선이고 살 궁리였다. 그렇게 지혜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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