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지방에 가서도 지혜의 생활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 지방이라 더더욱 할 일도 없고 출퇴근 시간은 더 짧아졌고 만날 사람들도 없어 일하고 쉬는 것을 제외하면 할 일이 없었다. 인사팀의 면접도 없이 회장님 면접 한 번으로 입사한 '서울에서 모셔온 직원'인 지혜에게 경영지원팀 상무는 드러내놓고 불편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두 달 후에 있을 신사업 발표회 준비를 위해 그 누구도 업무에 간섭하지 말고 발표회 준비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회장님의 '어명'이 있었던 터라 지혜는 편하게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해진 건 발표회 장소밖에 없었다. 발표회에 대한 사전 홍보, 신기술에 대한 소개 리플렛과 동영상 등 홍보물 제작부터 공장 시연과 실시간 현장 연결까지, 지혜는 혼자 모든 걸 준비해야 했다. 발표회 준비를 하고 늦은 저녁이면 임원분들을 독촉하여 야식비를 받아내고, 팀 내 어린 현장 실무자들과 야식을 시켜 먹으며 밤 12시 혹은 새벽까지,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공장 시연에 필요한 설비들을 직접 나사 조이는 일까지 같이 하며, 지혜는 그저 즐거웠다.
모든 직원들이 한 마음으로 열심히, 즐겁게 준비한 덕분에 발표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발표회 후 일주일이 지나자 지혜가 입사했을 즈음 7,300원 정도였던 회사의 주식은 12,000원을 찍었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표정으로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보려던 경영지원팀 상무도 발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태도가 바뀌어 고생했다, 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업무들은 밀려왔다. 지방에 있는 회사라 외국어를 할 직원들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해외 관련 업무들은 모두 지혜에게 맡겨졌다. 신사업, 투자, 전시회 등 연이은 해외출장들로 쉴 틈이 없었다.
별 탈 없이 일만 하며 지혜는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출장도 많고, 일은 여전히 많았지만 마음엔 여유가 생겼다. 새벽에 수영을 배우러 다니고, 동생뻘인 직원들과 시간이 맞으면 주말에는 가끔 주변 도시들로 놀러도 갔다. 물론 그곳에서도 100% 즐겁고 좋기만 하진 않았다. 지혜의 업무가 점점 더 많아지자 회사에서는 후임을 한 명 뽑아주겠다고 했다. 회사 내 다른 직원의 소개를 받아 뽑은 후임을 위해, 지혜는 사업부 총괄 임원에게 부탁하여 해당 경력조차 없었지만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지혜가 부지런히 잘 가르치겠다고 말씀드려 신입사원이 되어야 할 직원을 주임으로 뽑았다. 연봉도 더 올려달라고 부탁하여 회사에서 제시했던 연봉보다 몇 백만 원을 더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자신의 배려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지혜는 그 후임을 통해 배웠다. 1년을 옆에 끼고 가르쳤지만, 이 아이는 도통 일이 늘지 않았다. 일머리가 없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후임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업무를 다시 하기 위해 지혜는 더 바빠졌다. 일머리만 없으면 다행이련만, 인성조차 한참 부족해 보였다. 차가 없는 후임을 위해 지혜를 비롯한 모든 나이 비슷한 직원들이 돌아가며 출퇴근을 도와줬지만 그 오랜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마움 한 번 표시하는 일이 없었다. 편의점의 1+1, 2+1 캔커피라도 하나씩 사줄 수도 있을 텐데 그조차 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기숙사 근처 카페에 내려달라고 하면서도 차를 태워준 직원에게는 커피 한 잔 사는 적이 없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회사에서는 업무적으로, 일로 풀지 못하면 인간적으로라도 풀어야 한다, 그래서 일이 되게끔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 지혜가 몇 번 이야기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지혜도 포기하게 되었다. ‘의뭉스럽다'란 표현을 사람으로 만들면 이 아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표현과 딱 들어맞는 아이였다.
신사업의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계열사로 분리가 되면서 모 대기업을 퇴임한 임원 출신의 사장이 새로 오고, 사장은 본인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는 부장 하나를 또 데리고 오고, 새로 온 T 부장은 지혜의 상사가 되었다. T 부장의 첫 출근 즈음, 지혜는 회장님을 모시고 해외 출장 중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니 주변의 동료들은 지혜가 없는 동안 후임인 J가 T부장과 술자리를 함께 하며 지혜의 험담을 했다며 후임의 말만 듣고 지혜를 안 좋게 보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해 주었다.
“설마 그래도 부장씩이나 되는데,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얘기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겠어?"
라고 웃어넘겼던 지혜는, 본인이 했던 말이 무색하게 함께 일한 첫날부터 T 부장의 견제와 시비를 참아내야 했다.
회장님이나 본사의 임원들을 모시고 가야 하는 출장이나 외부 미팅이 있어 보고를 하면 ,
“김과장은 어느 부서 사람인 거야?"
"그렇게 본사 분들이랑 일할 거면 부서를 옮겨야 하는 거 아니야?"
라며 시비를 걸었다. 지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부장님, 제가 본사 업무하면서 저희 부서 업무 안 한 게 있습니까?"
본인이 컨트롤이 안 되고 맘대로 일을 시키지 못하는 팀원이 맘에 안 드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혜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에 나와 일을 하면서 본인에게 맡은 업무는 어떻게든 다 끝냈다. 심지어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날도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회사가 있는 지역으로 바로 돌아와 샤워만 하고 그대로 회사에 출근할 정도였다.
"나는 언제든 김과장을 가르칠 마음은 있어요."
T부장은 지혜에게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정말 그랬을까? 정작 사업부 사장이나 본사 임원에게는 내 팀원이니 업무 조율해 달라 말 한마디 못하면서, 그 불만을 고스란히 지혜에게 쏟아내며 불평하는 상사를 위해, 회장과 다른 임원들에게 "저는 제 부서가 따로 있으니 제 부서에 집중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지혜가 말해야 하는 걸까?
팀장 혹은 직속상사의 역할이란, 최소한 팀원들에게 우산이 되어주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멀쩡한 우산이 아니라 찢어진 우산이라도 좋다. 최소한, 팀원이 들고 있는 우산까지 뺏어가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찢어진 우산조차 되지 못했던 T부장은, 어느 날 지혜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요점은, '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팀원은 필요 없고 함께 일할 수 없으니 퇴사하던지, 본사에 이야기해서 부서를 바꾸던지 결정을 하라'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메일을 공개하고 퇴사를 종용하는 상사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겠지만, 10여 년 전,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결국 본인과 일을 못하겠다는 부장의 메일을 설명회 이후 지혜를 좋게 봐준 경영지원팀 상무에게 보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부서를 바꾸거나 조율이 안 되면 퇴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경영지원팀 상무님은 지혜가 퇴사 또한 고려하겠다고 하자 회장님에게 이야기해 부서를 옮겨주겠다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부터, 설명회를 준비하고 설비들 나사까지 일일이 함께 끼워가며 일구어 계열사로 독립까지 한 사업부에서 적을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지혜로선 심란하고 억울했다. 그러나 겨우 세 명의 인원이 있는 팀에서 상사와 후임이 한 편이 되어 나가라고 하는 판국에, 미련을 떨며 굳이 붙어 있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내 홈페이지의 부서 이동 공지를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지혜는 주섬주섬 책상의 짐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회사의 책상에는 많은 짐을 두지 않기로. 언제든 나가거나 옮길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짐만을 두고, 회사 내 본인의 자리를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가볍고 간편하게 지내야겠다고, 짐들을 챙기며 씁쓸하거나 속상하거나 아쉬운 마음이 들 새도 없이 이동하겠노라고.. 불쑥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