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회복 그리고 첫 이직

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by 하우주

퇴사 후 우울하게 있던 지혜에게 엄마는 뭐든 해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마침 전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던 미국의 직원이 언제든 놀러 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친한 친구는 6개월 전에 캐나다에 뒤늦은 어학연수를 가 있었고 어학연수 시절 친하게 지낸 독일의 친구도 언제 한 번 유럽으로 놀러 오지 않을래 라며 메일을 보내왔다.


지혜는 그렇게 특별한 서른 살을 보내게 되었다. 첫 회사에서 좋은 상사분들 덕분에, 홍콩 파견 근무 덕분에 돈도 꽤 모아 두었었다. 환율이 최악이었지만, 지혜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3월 초 최대한 가볍게 짐을 싸 미국 플로리다로 향했다. 지혜를 초대한 중년아줌마인 미국 직원과 가족들은 기꺼이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매일매일이 선물 같은 날씨였고, 한적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지혜는 아무 고민도 생각도 없이, 염치도 없이 ㅎㅎ 한 달가량을 플로리다에서 머물렀다.

한 달 후 지혜는 플로리다에서 미국 동부를 지나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갔다. 혼자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는 눈물 그렁그렁한 친구의 환대를 받으며 몬트리올에 짐을 풀었다가 한 달 후 다시 캐나다와 유럽을 여행하고 7월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른 살은 여행을 하기에 좋은 나이였다. 너무 어리지 않아 들뜨지 않을 수 있었고 너무 나이를 먹지도 않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적당한 절제와 적당한 책임감, 충분한 체력, 서른 살 그만큼의 자유로움으로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고 여행 기간 동안 넘치게 많은 사랑을 느끼고 위로를 받았다.


지혜는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이직 준비를 했고, 한 달이 안 되어 두 번째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면접 때 지혜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며 입사를 서둘러달라는 대표의 부탁으로, 지혜는 부랴부랴 회사 근처에 작은 방을 구하고 일주일 후부터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두 번째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다. 그렇게 지혜의 두 번째 중소기업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회사는 여초 회사였다. 회사 고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혜는 탄탄하게 잘 성장할 것이라 생각하고 입사를 결정했다. 남자 팀장 아래 세 명의 여직원으로 구성된 지혜의 팀은 다들 성격도 조용하고 큰 잡음 없이 조용히 맡은 업무들만 하며 지내는 편이었다. 반면 옆 팀은 언제나 시끌시끌했다. 팀 전원이 여자 직원들이었고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들만큼 이슈들도 많고 다들 목소리도 크고 활기찬 편이었다.


옆 팀의 여자 팀장은 남.달.랐.다. 오후가 되면 보통 여직원들이 아침에 하고 온 화장이 다 지워져 쌩얼 같은 얼굴인 것에 반해 그 팀장은 언제나 진한 화장을 유지했고, 팀장의 높은 하이힐은 언제나 사무실에 그녀의 존재감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돌아보게 되는 독특한 패션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두 번 굴리고 세 번 굴린 현란한 영어 발음을 구사했다. 직원들은 그녀를 마녀, Witch라 불렀다. W팀장은 애사심도 대단했고 대표와의 관계 또한 돈.독.했.다. 그 애사심의 시작이 무엇인지 카더라 통신 외에 정확히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W팀장의 대단한 애사심과 그에 반해 한없이 낮은 자존감과 속 빈 자존심 때문에 퇴사한 직원들이 몇몇 있다는 이야기를 지혜는 입사 초에 들었다. 그러나 같은 팀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도 없었기에 지혜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지혜는 금요일에는 새벽 2-3시까지 해외 업체들과 메일을 주고받을 정도로 일에 미쳐 있었고, 지혜가 속한 팀과 옆팀의 팀원들은 대체적으로 일을 잘했고 열심히 했다.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와 똘똘하게 일 잘하는 현업 직원들의 노력이 회사를 조금씩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었다. 물론 일머리가 없는 구멍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지혜의 팀장과 지혜보다 몇 달 늦게 들어온 후임이 그 구멍이었지만 지혜가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혜는 먼저 회사에 들어온 다른 팀원과 함께 조용히 할 일을 하고 구멍이 난 부분을 메우느라 좀 더 야근을 하며 별 탈 없이 회사생활을 해 나갔다. 시간이 좀 지나 회사에서는 회사 근처에 아파트를 구매해 기숙사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회사와 집이 가까워지자 지혜는 더 일을 많이 했다. 주중에는 늦게까지 일을 하고 금요일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기숙사로 들어가면 지혜는 주말 내내 잠을 자다가 배가 고프면 일어나 끼니를 대충 때우고 청소나 빨래, 집 정리들을 잠시 하고 다시 잠을 자고 쉬는 생활을 반복했다. 일하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지혜는 그렇게 당시 유행하던 단어인 '건어물녀'의 비슷한 양상으로 회사-집을 반복했다.


해외 거래업체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니 고객사들은 지혜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했고 당연히 하나씩 둘씩 실적도 쌓여갔다. 신규 고객사들도 점점 더 많아졌고 회사에서 새롭게 진행하는 신규 프로젝트의 PM(Project Manager)도 맡게 되었다. 직원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까칠하기로 소문난 지원 부서의 여직원 한 명도 지혜에게만큼은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마음을 다 터놓을 만큼 친해지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본인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왔다. 지혜는 똑 부러지게 일 잘하고 딱히 모난 데 없는 평범한 직원으로 조용히 회사 생활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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