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스물아홉 살이던 해 12월 31일까지 근무를 하고, 지혜는 이주일 후 지방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졸업한 대학 근처에서 계속 살고 있던 터라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이삿짐은 1톤 트럭 하나에 꽉 찼다. 돌이켜보면 왜 그때 바로 이직을 준비할 생각조차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이라는 건 늘 진하게 여운이 남는 법이라 지혜는 다른 회사를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홍콩에서 본사로 복귀했을 때 지인을 통해 이직을 제안받았었지만, 지혜는 회사를 떠나 다른 회사로 간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평생 다닐 줄 알았나 ㅎㅎ'
지혜는 그때를 생각하며 혼자 씁쓸하게 피식 웃곤 했다. 어쩜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랐을까. 너무 순진하게 사람들을 믿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사람들이 거짓을 말할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을, 지혜는 사실 마흔이 될 때까지도 여전히 계속 반복하고 또 상처받았다.
남자친구였던 Z과장과도 헤어졌다. 퇴사 후 서울에 있었던 첫 주에 남자친구는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 지금은 11번 출구로 바뀐 그때의 강남역 4번 출구 앞 2층에 있던 커피빈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오랜만에 만난 지혜를 별로 반기지도 않고 데면데면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회사에서 Z과장이 있는 필리핀으로 보내줄 텐데, 그걸 못 참고 퇴사를 했다며 Z과장의 어머니는 노발대발했다고 했다.
"엄마가.. 너는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애 같대.."
Z과장은 이 말을 하고 난 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뭘 의미하는지 지혜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
여전히 대답이 없는 Z과장이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고 지혜는 일어섰다.
'하.. 이런 찌질한 마마보이를 지금껏 만나고 있었네..'
지혜는 커피값을 본인이 계산한 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카페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마마보이도 남자친구라고, 헤어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엎드려 펑펑 울고 있는 지혜의 손 위로 조그마하고 따뜻한 솜뭉치가 느껴졌다. 애교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던 친구와 함께 기르던 고양이가 어느새 다가와 지혜의 손등에 자기 앞발을 무심한 듯 툭 올려놓고 지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 말라는 듯..
어미를 잃고 길가에서 거의 죽어가던 아이를 지인이 데려와 며칠을 데리고 있다가, 지혜에게 키울 생각이 있냐고 묻길래 데려온 아이였다. 언제 어미를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꾹꾹이조차 할 줄 모르던 아이, 키운 지 2년이 되어가도록 곁을 주지 않던 아이의 낯선 위로에 지혜는 말로 다 표현을 못할 만큼 마음이 따뜻해졌다. 함께 사는 반려동물들이 주인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걸, 지혜는 책에서보다 먼저 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이야기가 오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온 딸에게 지혜의 부모님은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어도 본인이 알아서 공부를 했고 무슨 일이든 고민하고 확신이 서면 부모님에게 어떻게 하겠노라고 다 이야기를 하던 지혜였기에 늘 그랬듯 부모님은 또다시 믿어주고 기다렸다.
지혜는 그저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 당시 지혜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지혜는 본인이 우울한지 알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좀 지쳐서 무기력할 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별 감정의 동요 없이 그렇게 쉬는 것 말고는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쓴다거나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기력하게, 조용히 지혜는 서른 살의 1월을 보내다가 1월 25일 회사의 급여일에 통장을 확인했다. 통장에는 며칠 전 메일로 받은 퇴직금 금액만 입금되어 있었다. 부사장이 이야기한 위로금은 없었다. 위로금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기가 어려움이 있는 걸까 생각했던 지혜는 2,3일을 더 기다리다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김지혜입니다."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저 사직서 냈을 때 퇴직금이랑 위로금 같이 챙겨주신다고 했는데.. 위로금은 안 들어와서 전화드렸습니다."
"위로금?"
"네, 퇴사한다고 말씀드렸을 때 위로금 따로 챙겨주시겠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내가요? 언제?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위로금 따로 챙겨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야, 김지혜 씨 이상한 사람이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네?"
"분명히 부사장님께서 저한테 필요한 거 없냐 물어보시고 제가 노트북 그대로 쓰겠다 했더니 가져가라 하시고는 퇴직금이랑 위로금도 조금 챙겨보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김지혜 씨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으니까 끊읍시다."
'내 기억이 잘못됐나? 아닌데, 분명히 위로금을 주겠다는 얘기를 두 번이나 했는데.'
전화를 끊은 지혜의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의 위로금을 주겠다는 말도 없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많으면 한 달 치 급여, 그 정도만 되어도 그야말로 '위로'가 될 거라 생각했다. 퇴사하겠다고 얘기했던 그 자리에서 A4 용지에 볼펜으로 휘갈겨서라도 내용을 적고 사인을 받아왔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미친년 취급하며 지혜가 혼자 이야기를 지어낸 것처럼 말하는 부사장의 태도에 지혜는 화조차 내지 못했다. 끝까지 속은 자신한테 화가 나고, 끝까지 농락당한 것 같아 억울함과 분함이 밀려왔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두렵기도 했다. 모든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지혜는 엉엉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지혜의 울음소리를 들은 엄마가 방안으로 급히 들어왔다. 왜 우냐고 묻는 엄마에게 지혜는 울음을 삼켜가며 겨우 겨우 힘들여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서울에 가자"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엄마는 지혜에게 말했다.
"내가 그 회사 앞에 가서 부사장이라는 그 새끼를 싸대기라도 때리고 우리 딸 괴롭혔냐고 따질 테니까, 가자 회사에"
눈물을 참으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엄마를 보며 지혜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지혜는 실컷 울었다, 다음 날 눈이 퉁퉁 부어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지만, 서울은 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울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