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대표님이 그만두시고 이주일쯤 후에 새로운 대표님과 직원 두 명이 왔다. 그러나 경력이 화려한 모 증권회사 출신의 새로운 대표님은 일찌감치 분위기를 감지하신 건지 감당 못할 무언가가 있으셨던지 온 지 두 달도 안 되어 그만두셨다. 같이 왔던 직원들도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있는 동안 조금 가까워진 회계팀 과장은 나중에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지혜와 가끔씩 연락을 했지만 회사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재밌는 곳이었어"
그뿐이었다.
회사 내에는 부사장이 데리고 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또 데리고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출도 없이, 우회상장을 한 회사의 매출로만 두 회사가 살림을 꾸리고 있는데 직원들은 계속 늘어났다.
부사장의 소개로 회사에 들어와 사무실 하나를 차지한 Y재무이사는 본인이 관여할 일도 아닌 회사의 인사, 경영 업무를 모두 휘젓고 다녔다. 지혜가 여전히 사장님의 비서 업무를 병행하며 혼자 사장님의 스케줄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마뜩지 않아하던 부사장과 그 측근들은, Y재무이사가 회계 학원에서 가르쳤던 제자라는 여직원 하나를 비서로 신규 채용했다. 비서 업무를 비롯하여 지혜가 하고 있던 많은 업무들은 지혜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지혜에게는 업무를 인수인계하라는 지시만이 내려왔다. 의도적으로 업무를 주지 않고, 회사의 소식들도 지혜에게는 아무도 공유해 주지 않았고, 지혜가 하고 있는 일들도 모두 못하게 하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지혜는 본인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유일하게 사장님 라인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박부장도 적당한 선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지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도, 어차피 지혜는 필리핀으로 갈 수도 있으니 본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지혜는 내심 서운하면서도 이해해 보려 했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어느 날, 지혜가 홍콩 지주회사의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위해 Y재무이사 자리에서 모니터를 함께 보고 있는데 메신저가 떴다. 새로 온 비서 X였다. 그날 먹은 점심이 어떠했다는 내용과 저녁에 만날 것을 묻는 내용이 반말로 적혀 있었다. Y재무이사는 허둥대며 황급히 메신저를 끄고, 지혜는 모른 척, 하던 보고를 마저 했다. 다음 날 지혜는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을 갔다가 새로 온 비서를 마주쳤다. 거울을 마주하고 나란히 서서 양치를 하며 지혜가 물었다.
"Y이사님이랑 되게 친하신가 봐요? 메신저로 서로 반말하시는 것 같던데"
치실로 마무리를 하던 X의 당황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네? 네.. 아~ 제가 좀 이사님한테 막 굴어서 ㅎㅎㅎ"
치실을 대충 버리고 황급히 나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지혜는 아무 일 없는 듯 입을 헹구고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지나 자리에 앉아있는데 재무이사가 지혜를 불렀다.
'똑똑'
재무이사 사무실 문을 열고 지혜가 말했다.
"이사님 부르셨어요?"
"어? 어.. 지혜 씨! 들어와요. 어.. 딴 게 아니고, 내가 X 씨랑 좀 친해. 내 제자였어서."
"네."
"..."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어? 아니 아니, 가봐도 돼요."
한심한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뒤돌아 나오면서 지혜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휘젓고 다닌 물은 흙탕물이 되어 가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검은 백조이건 흰 백조이건, 흙탕물에서 놀면 흙탕물이 묻을 터였다. 회사는 침몰하는 배였다. 그만둔 두 여자 차장님 중 이차장은 첫 계약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때 지혜에게 말했었다.
"우리의 거대한 전함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네."
그러나 선장은 더 이상 배에 오르지 않았고 배의 방향도 목적지도 몰랐다. 선장이 없는 배는 혼란스러웠다.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어디로 흘러가든 배의 키는 버려둔 채 함께 목적지를 향해 가려던 좋은 선원들은 모두 배에서 내렸고 남은 선원 몇 명은 배에 뭐가 실려 있는지 뒤지고 살피느라 바빴다. 사장님의 친형제들이 400억의 상당 금액을 나눠 가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회사에 남은 사람들은 300억 보호 예수금이 풀릴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멍이 난 전함은 침몰하고 있었다.
지혜는 결정을 해야 했다. 지혜 나이 스물아홉 살, 서른을 앞두고 본인의 인생에 무엇이 최선일지 지혜는 혼란스러웠다. 지혜는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Z과장과 결혼을 하면 지혜도 필리핀으로 발령을 낼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보자며 남자 친구인 Z과장은 지혜의 퇴사를 말렸다.
지혜의 주변에는 아홉 수가 좋지 않다며, 스물아홉 살이 되기 전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서른이 되기 전 후반부가 되자 여러 여자 동기들이 청첩장을 보내왔다.
지혜 또한 사장님의 빠른 추진에 힘입어(?) 분위기에 휩쓸리고 떠밀려 Z과장 부모님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Z과장도 지혜 부모님에게 인사를 했다 조만간 결혼을 해야 할 것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지혜는 결혼보다 회사를 계속 다니냐 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결혼이라는 걸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결혼이라는 것이 지혜의 인생에는 없는 단어인 것처럼 생소했다. 결혼이야기를 Z과장과 회사에서 계속 언급하는 데도 마치 남의 일인 양 지혜는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반면 Z과장의 집에서는 해를 넘긴 후 봄에 결혼식을 하자며 결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건 아닌 거 같아..'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혜는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일과 회사에 대한 선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오랜 생각 끝에 지혜는 결론을 내렸다. 지혜에게 회사는, 일은 소중했다. 회사라는 곳을 다녀보니, 본인은 회사에 최적화된 사람 같았다. 일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지혜의 기준에는 언제나 일이 1순위였다.
"어떤 상황에서건 지혜 씨에게 최선을 구하는 선택을 하길 바래요."
회사에서 만났지만 좋은 선배처럼, 멘토처럼 늘 지혜로운 조언을 해 주던 박차장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이렇게 결혼하는 건 아니지, 회사 생활이 이렇게 되면 안 되지. 내 꿈은 내 일을 오래오래 하는 거였으니까, 여자 임원도 되고 대표도 하고. 그게 내 꿈이니까'
'나에 대한 최선의 선택을 하자'라고 마음먹고 지혜는 퇴사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별 거 없었다. 많은 업무들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지혜에게 남은 업무라곤 해외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뿐이었다. 마음먹고, 작정하고 온 회사 사람들이 똘똘 뭉쳐 내쫓으려고 하는 판국에 지혜에게 남은 건 없었다. 물론 지혜의 편도 없었다. 사장님도, 박부장도 그저 한 발자국 멀찍이 서서 방관만 할 뿐이었다.
12월 초가 되어 지혜는 한국 본사에 올 때마다 일을 잘한다며 칭찬해 주던 일본의 기술 자문 교수님에게 퇴사를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교수님은,
"왜? 니가 왜? 너처럼 일 잘하는 애가 나가면 어떡하냐?"
라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부사장이 괴롭히는가 보네? 퇴사하기 전에 일본 한 번 놀러 와라, 여기 한국 학생들 지내는 집에 남는 방 있다"
"아.. 그럴까요? 한 번 놀러 가도 될까요?"
"와라, 바람이나 한 번 쐬고 생각도 정리하기에 이 동네 조용하니 괜찮다 “
"일정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나 없어도 상관없잖아? 그냥 아무 때나 다녀가. 내가 학생들한테 얘기해 놓을게. 외국 혼자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아?"
지혜는 여전히 퇴사를 반대하고 있는 Z과장에게 생각 정리도 할 겸 일본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 주 일본행 비행기표를 사고, 금요일 연차를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