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지혜는 도쿄에 도착하여 신칸센을 타고 학교가 있는 도시로 갔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주변 풍경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학교가 위치해 있다는 기차역에서 내리니 교수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이야~ 반갑다. 잘 찾아왔네”
“이 정도는 찾아오죠 ㅎㅎ”
“잘 왔다, 나는 오후부터 계속 일정이 있어. 숙소까지만 데려다주고 나는 학교로 다시 가야 하는데, 괜찮지?”
“네, 그럼요”
숙소는 3층 작은 다락방을 포함한 단독주택이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 4명이 함께 지내고 있었고, 다락방은 오고 가는 한국 손님들이 있으면 사용할 수 있도록 꾸며놨다고 했다. 1층에서 문을 열어 주고 방까지 안내해 준 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혜는 입구에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작고 아늑한 방 한쪽의 아담한 사이즈의 창문으로 밖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혜는 아담한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 꼭 필요한 것만 단촐하게 있어 번잡스럽지 않았다.
2박 3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지혜는 짐을 정리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 주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동네, 사방의 하얀 눈풍경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새로운 곳에 오고 낯선 곳을 걸으며 본인에게 집중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지혜는 안정이 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느릿느릿, 길가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는 돌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회사를 다닌 동안은 늘 바쁘고 마음은 뭔가 쫓기듯 분주해서 자신을,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듯했다. 그렇게 한가롭게 오후를 보내고 동네에 맛있다는 회전 초밥집에 가서 좀 이른 저녁으로 초밥을 실컷 먹고 풍경과 다르게 춥지 않은 날씨에 감사하며 또 마을을 걷다가 동네 어귀에 있는 슈퍼마켓을 발견하고는 복도 한 칸도 빼먹지 않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기 사람들은 뭘 먹고 뭘 쓰면서 살아갈까.. 물과 간단한 간식류를 사 들고 털래털래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니 일찍부터 잠이 왔다. 복잡한 생각 없이, 일본의 어느 마을의 낯선 숙소에서 지혜는 잠자리에 대한 불편함도 없이 스르르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온천에 갔다. 교수님은 지혜가 내렸던 기차역에서 더 시골 동네로 가는 작은 기차가 있고 그 기차를 타고 어느 역에 내리면 좋은 온천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일본어로 간단한 인사말과 무슨 무슨 쿠다사이, 감사하다는 말만 겨우 할 줄 알았지만 온천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기차를 타고 온천이 있다는 작은 마을에 가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부신 풍경과 작고 아담한 기차, 기차 안의 노란색 예쁜 의자들. 마치 동화처럼 눈 덮인 시골길을 달려 지혜는 마을에 도착하고, 손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온천을 즐기고 나와, 온천의 매점에서 꼭 사 먹으라던 병에 든 우유를 사 마시고 또 마을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마을과 산길 어딘가를 잇는 나무다리 하나에 서서 흘러가는 시냇물을 구경하다 지혜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오래된 나무다리의 난간을 잡고 지혜는 그야말로 '엉엉' 울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낯선 일본의 어느 한적한 동네 어딘가에서 지혜는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터져 나오는 눈물을 그대로 쏟아냈다. 한참을 앉아 울다 보니, 본인이 그렇게 울고 있는 모습이 문득 그전에 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남자 주인공 츠네오가 이별을 하고 난 후 난간을 잡고 울던 장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지혜는 그 순간 영화 장면을 떠올린 본인이 참 웃기다는 생각을 하며 기차를 타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날 그 시간들을 보내며 본인이 무슨 생각을 더 했고 어떤 감정들을 느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지혜는 기차 안의 노란 의자와 맛있었던 유리병의 우유와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던 것과 울고 난 이후 뭔가 툴툴 털어 버린 듯 가벼운 마음이었다는 것은 십수 년이 지나도 또렷이 기억했다.
지혜는 다시 작은 기차의 노란색 예쁜 의자에 앉아 숙소로 돌아가면서, 한국으로 돌아가 출근을 하면 사직서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출근을 하고 보니 회사가 어수선했다. 회사 내에 무슨 행사라도 있는 듯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지혜는 자리에 가방을 놓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봤다.
"대리님 오늘 주주총회잖아요"
"오늘이 주주총회예요?"
"네, 대리님 모르셨어요?"
"네.. 몰랐네요 ㅎㅎ"
"아.."
직원은 무슨 얘기인지 알겠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한 번 보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투자금은 다 써가고 매출은 없어 주가가 곤두박질친 지는 오래였다. 이제는 회장님이 된 사장님을 바꾸라며 화를 내는 사람부터, 땅 꺼지듯 한숨을 쉬며 회사 근황을 묻는 사람들까지, 직원들은 하루에도 수십 통의 주주들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런 주주들을 피해서 조용히 급하게 주주총회 날짜를 잡긴 했겠으나, 그래도 1-2주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회사의 그 누구도 지혜에게 주주총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막 회사에 도착한 지혜의 옆으로 무슨 첩보영화 주인공처럼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온 사장님이 직원들과 급히 지나갔다.
지혜는 자리에 앉아 자리를 비운 동안 받은 메일들을 확인했다. 주주총회가 열리는 대회의실은 시끌시끌했다. 주주들의 큰 소리가 밖의 사무실까지 들렸다. 다른 회사들 주주총회는 금방 끝난다던데, 그 해 회사의 주주총회는 2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사장님은 다시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황급히 회사를 빠져나갔다. 오전 내내 사무실은 업무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어우선했고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지혜는 부사장의 방으로 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이 사람을 마주하고 싶진 않지만 모든 회사 운영을 부사장이 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아 그래요?"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고 부사장은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날짜는 언제까지?"
"12월 말까지만 하면 정리가 다 될 것 같습니다, 인수인계서는 따로 작성해서 넘기겠습니다. "
12월 말이 되기까지는 2주가 남아 있었다. 지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2주 동안이나 뭘 하지..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해요. 다른 거 회사에서 해 줄 건?"
"입사 후부터 계속 썼던 노트북이라, 노트북은 그대로 가지고 퇴사하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해요. 내가 위로금도 조금 챙겨보라고 얘기해 볼게요"
부사장은 욕심 많은 못생긴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지혜에게 배려해 주는 척 이야기하고는 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친히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으리라, 지혜까지 나가면 사장님도 거의 회사에 안 나오니 온 회사가 본인 세상이 될 터였다. 그래도 얼마가 될지 모르나 위로금에 노트북까지 준다니, 기쁜 나머지 뜻하지 않은 배려를 약속한 부사장이 양심은 있는 인간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인 Z과장에게는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퇴사를 하겠다고 통화로 이야기했다.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지만, 마음을 정했다는 지혜의 말에 더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동안의 지혜의 마음고생과 회사에서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좀 더 참아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랬다, 그 누구도 지혜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혜는 차분히 정리를 해 나갔다. 이미 넘긴 업무들이지만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정리하고 엑셀 인수인계 시트를 꼼꼼하게 자세하게 프로젝트 시트별로 매뉴얼화했다. 연락을 하고 있던 해외 직원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가지고 있던 서류들도 다 다시 들여다보고 누가 와도 바로 일할 수 있게 정리를 해 두었다. 부사장의 측근들은 모두들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혜는 회사에서 한낱 대리일 뿐인데 누구도 지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지난 사건이 있은 후 Y와 X는 지혜의 눈치를 보며 회사 내에서 한동안은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라며 빨간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출근한 12월 24일, 수시로 Y이사의 방을 드나드는 X를 보며, 지혜는 회사라는 곳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혜에게 특별한 회사가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시간을 보내는 곳, 월급 주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퇴사 당일 둘이서만 점심을 먹으면서 김 부장은 지혜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힘이 없다 ㅎㅎ"
"부장님이 뭘요.."
사람 좋은 김부장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했다. 그 진심이 느껴져서, 지혜는 웃으며 밥을 먹다가 툭 공깃밥 위로 눈물을 떨구었다. 금세 눈물이 주르륵 또 흘러내렸다.
"부장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돌이켜보면 그 많은 일들을 겪어내기에 지혜는 여전히 어렸고 여렸다. 담담히 정리했지만 첫사랑과 헤어진 것처럼 지혜는 마음이 아렸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첫 회사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