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산들, 나의 ‘좋은 어른’들이 사라졌다

여자 김차장의 파란만장 중소기업 이야기

by 하우주

지혜가 본사로 복귀한 뒤에도 여전히 뚜렷한 사업 성과는 없었고 회사는 버는 돈 없이 받은 투자금으로 엄청난 지출만 하고 있었다.


대표님은 지혜가 적은 생활비로 홍콩에서 일 년 가까이 지냈던 것에 대해 내내 미안해하셨다. 그렇게 미안해하시고 마음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지혜는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에는 이전 분들이 계속 남아 있어서 지혜는 그분들과 함께 다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지혜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석 달쯤 지났을까, 지주회사의 통장에 있던 투자금은 보호예수금 300억을 제외하고 400억 가량을 모두 소진하여 해외에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직원들 월급 줄 돈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지주회사는 본사에서 돈을 빌려 직원들의 월급을 주고 지주회사의 운영비를 지출해야 했다. 투자금을 받고 약 1년 6개월 만이었다.



투자금 소진 소식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던 어느 날, 잠시 외근을 다녀오던 지혜에게 메시지가 왔다. 입사 초기부터 잘 따르고 의지했던 여자 상사인 박차장과 사장님 이전 직장에서 같이 근무했었다가 조금 늦게 현재 회사로 합류한 또 다른 여자 상사 이차장이 갑작스럽게 퇴사를 하게 되어 인사를 못하고 간다는 박차장의 메시지였다.


'이게 무슨 말이지?'


지혜는 당황스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급히 사무실로 뛰어갔다. 나란히 지혜의 맞은편에 있던 두 자리가 휑하게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회사에 함께 했던 김부장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자리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흡연구역으로 갔더니 늘 사람 좋은 표정의 김부장도 멍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부장님 무슨 일이에요? 박차장님이랑 이차장님 진짜 그만두신 거예요? 왜요?"

김부장은 대답이 없었다.

“부장님 저 오다가 박차장님이 메시지 보내셨던데요, 인사 못하고 간다고 다음에 따로 연락하겠다고.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렇게 됐대"

"네? 뭐가 그렇게 돼요?"

"나도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어.."


지혜는 회사 밖으로 나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홍콩에 있을 때 사귀게 된 사장님의 친척이자 필리핀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Z과장이 지혜의 남자친구였다. 사장님의 친동생이 필리핀 공장 사장으로 있으니 뭔가 내용을 알지 않을까 싶었다.


"박차장님이랑 이차장님이 갑자기 그만둔다면서 메시지가 왔어. 뭐 들은 얘기 없어?"


급하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하면서 지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만둘 수도 있지, 뭘 울고 있어.."

"그만둘 수도 있다고? 그 두 분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

Z과장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지혜의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회사 건물 밖에 울리고 있었다.



두 차장님이 그만두고 일주일쯤 후 대표님도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여전히 조용히.. 두 차장니이 떠난 후 어색한 분위기만 맴돌던 어느 아침, 대표님은 조용히 지혜를 불러 회사를 그만 나오신다고 얘기하시고는


"지혜야 회계를 배워. 넌 영어를 잘하니까, 네가 회계공부를 좀 하면 날개를 달 거다, 나중에 따로 연락하마."


라고 인사를 하셨다. 두 차장님이 회사를 떠날 때처럼 놀라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지혜는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연이어 아버지처럼 지혜를 예뻐해 주셨던 상무님과 이사님도 회사를 그만두셨다. 자의로 그만두신 건지, 어쩐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혜 위로 쏟아지는 비를 든든히 막아주던 우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 뒤 회사는 부사장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언제나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다들 목소리는 왜 그리 큰지.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속이 빈 사람들이 주로 목소리가 컸다. 지혜는 두 차장님과 대표이사님의 퇴사에 대해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회사를 차지한 부사장과 측근들 입장에서 한국 본사에서는 지혜와 김부장 두 사람만이 사장님 라인이었고 껄끄러운 사람들이었다.



사장님의 배려로 재택근무를 하며 일주일에 두 번만 출근을 하던 여직원 둘은 부사장 라인이 되었다. 지혜는 그 둘을 보며 분노했다. 몇 년을 재택근무를 하며 편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사장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조차 없었던 걸까? 정말 사람이 저럴 수 있는 걸까? 두 사람은 오히려 나서서 사장님이 이전 회사에서부터 경쟁사나 고객사에서 회사를 방문하면 가방을 받아주는 척하며 그 안에 있던 서류들을 사장님이 직원들을 시켜 다 복사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혜 씨, 지혜 씨가 생각하듯이 사장님이 그렇게 고결한 분은 아니야"

라고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지혜는 얼굴에 대놓고 욕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혼자 분노했다.

‘사장님은 그런 분은 아니셔.. 고마운 걸 모르고.. 이 나쁜 년들아..‘



그즈음 아주 간혹 회사에 들르시는 사장님이 지혜를 불러 잠시라도 사장님 방에 들어갔다 오면 부사장은 꼭 지혜의 자리로 와 서성거리며 사장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며 묻곤 했다.

"필리핀 Z과장이랑 결혼 언제 하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지혜가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답을 하면 부사장 쪽 사람들은 아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말로 사장님은 회사나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캐나다의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러시아 마피아가 살던 집을 우연한 기회로 사게 되었다. 지하에 엄청난 규모의 와인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Z과장이랑은 올해를 넘기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떠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지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혜는 사장님에게 조카와 사귀는 아이가 아닌, 일 잘하는 직원으로 인정받아 회사에 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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