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의 기록
나의 아지와 냥이는 둘 다 한 살이 되었을 즈음 나를 만났다. 아지가 올해 5월이 되면 8살이 되고 냥이는 5살이 되니 나와 함께 한 시간이 각각 7년, 4년이 되어간다. 우리가 만난 이후 아이들은 두 배 넘게 커지긴 했지만(!) 아이들은 이전의 생활이 힘들어, 양껏 먹지 못해 왜소했을 뿐 처음 만났을 때도 둘 다 거의 다 자란 성견, 성묘의 모습이었다. SNS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아기 강아지와 고양이, 다른 아기 동물들을 보면서 나는 아지와 냥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주인 가족들에게 맞기 전의, 상처받기 전의 아지의 어릴 때의 사랑스러울 모습과 동네 모퉁이 어딘가에서 어미 냥이와 장난을 치고 있을 똥꼬 발랄한 냥이의 어릴 때의 귀여운 모습을, 나는 본 적도 없으면서 그리워했었다. 요즘 나는 길냥이 가족들을 만나면서 내가 나의 아지와 냥이에게 그리워했던 새끼 때의 모습을 대리 충족하고 있다. 마음의 많은 부분들이 반려동물과 길냥이 가족으로 채워진 채 살아가고 있다.
늘 조용하고 점잖은 아지를 두고 집에 놀러 오신 친척 분은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셨고, 처음 데리고 왔을 땐 곧잘 사고도 치던 냥이는 군기반장 아지 누나의 불호령과 앞발의 제지가 이어지자 덩달아 사고 안 치는 조용한 고양이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 집은 나를 포함해 조용한 내향형 인간과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는 장소가 되어 정적만이 흐르는 시간이 꽤 많다. 그리고 나는 이 고요한 집에서의 시간들을 좋아한다. 실외배변만 하는 아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며칠이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살아갈 듯하다. 아지도 네 번 이상의 산책은 해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심심할까 싶어 몇 번 잦은 산책을 시도해 보았으나 아지는 거실 창문으로 멍플릭스만 볼뿐, 리드줄을 흔들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길에서 살아온 냥이가 바깥이 궁금하지 않을까 싶어 눈이 오는 날 눈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나갔지만 동네 떠나가라 울어대는 녀석의 심신 안정을 위해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오기 바빴다. 그런 걸 보면 우리는 함께 살며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때로 어떤 분들은 아지와 냥이를 돌보느라 생활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제약들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얘기하기도 하고, 직접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내가 인생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다. 반려동물, 특히 실내배변을 하지 않는 강아지와 혼자 있길 극도로 무서워하는 고양이를 혼자 케어하며 산다는 것은 그분들 말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키우며 삶을 배워가듯, 나 또한 반려동물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삶을 배워간다.
길냥이 가족들을 아침저녁 만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정말, 혹시, 만에 하나 이들을 임시보호라도 해야 할 상황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지는 예민하고, 냥이는 식탐이 많기에 애초에 불가능에 더 가까운 일이긴 하지만 단 1% 확률이라도, 그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만약 그렇다면 미리 대비를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사실 아지보다 냥이가 더 걱정이었다. 늘 먹는 것에 진심인 냥이가 사료를 먹다가, 아기고양이들이 자신의 사료를 탐낸다면 냥이는 참지 않을 것 같았다. 나와 아지에겐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냥펀치를 날리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길냥이들 밥그릇은 거의 대부분 사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년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오셔서 이 동네 길냥이들 사료를 챙겨주시는 캣대디님이 계시긴 하지만, 내가 아침저녁으로 가기 시작하면서는 밥그릇이 완전히 비는 날은 없었다. 길냥이들은 먹을 만큼만 먹고 배가 부르면 안 먹는 듯했다.
그럼 우리 냥이는? 처음 데리고 왔을 때 냥이는 1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배가 처져 있었고 몇 달이 지나자 앉으면 바닥에 배가 닿았다. 수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길에서 지낼 때 먹을 게 없으면 굶고, 먹을 게 있을 때는 왕창 먹어 배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냥이는 주는 족족 사료를 먹었고, 그런 냥이를 보고 혹시라도 탈이 날까 봐 자동급식기를 구매해 하루에 정해진 양만큼만 사료를 줬다. 그리고 약 1년 후에 냥이는 처음 데리고 왔을 때보다 두 배만큼 커졌으며, 실상 위에서 내려다보면 처진 배를 제외하곤 그렇게 뚱냥이도 아니었지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물병원에서는 냥이가 통통하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나도 먹는 것에 진심인 냥이를 보면, 자율급식을 한다는 고양이들이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길냥이들이 사료를 남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내가 냥이를 무제한으로 많이 먹는 아이라고 규정짓고 그동안 제한 급식을 하느라 맘 편히 양껏, 맘껏 사료를 못 먹게 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냥이도 스텐 밥그릇에 사료가 한가득 담겨 있으면 다 안 먹고 남길 수도 있는데, 나의 생각으로 냥이가 자신의 먹는 양을 조절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냥이를 규정지어 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동급식기가 제안하는 하루에 몇 번 나눠주는 급식 양이 아니라 그냥 밥그릇 가득 사료를 주면, 늘 사료가 채워져 있음을 알고 먹을 만큼만 먹고 남기는 건 아닐까, 괜히 그동안 기계 따위가 제안하는 급식 양만을 믿고 나도 모르게 냥이를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날부터 나는 자동 급식기를 쓰지 않고 냥이의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채워 두고 지켜보았다. 급식기가 제안한 양은 하루 60g, 그동안 냥이는 60g을 하루에 네 번씩 나눠 먹었다. 60g을 한 번에 주면? 놀랍게도 냥이는 많이 먹긴 했지만 60g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하루를 보내다가, 자다 일어나서, 혹은 심심하면 사료를 먹긴 했지만 그 모든 양을 한 번에 다 먹진 않았다.
어쩌면 냥이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주는 사료 또한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존 본능이 여전히 남아 주는 족족 사료를 먹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늘 밥그릇에 사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면 냥이의 식탐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냥이에게 미안함은 물론, 어느 단편적인 면만을 보고 누군가에 대해, 어떤 현상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한 채 내가 얼마나 섣불리 무언가를 판단하고 규정지으며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안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가 겪은 극히 일부분의 모습으로 내가 ‘안다’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규정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때론 어리석은 일일지 아찔함이 밀려왔다. 판단하고 규정하고, 그 기준으로 나의 호불호를 나눈 이후에는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세상을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살면서 단 한순간도 진실로 세상을 안 적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 앞에, 삶 앞에 겸손해진다는 말은 아마 인간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나의 시선으로 나의 기준으로 추측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규정짓고 결론 내어 버린, 일일이 기억조차 할 수 없이 많은 내 인생의 숱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모를 뿐’이 진리라는 말은, 살아온 단 한순간도 나는 안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최근에 읽은 마이클 A. 싱어의 [삶이 더 잘 안다]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당신은 저 밖의 외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내면에 있다. 그것도 그 안 깊숙이. 세상일은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당신은 오직 감각이 포착해서 마음속에 재생시켜 주는 그 부분만을 경험한다. 마음은 더 이상 텅 비어 있지 않다. 마음은 그 에너지를 당신의 감각 범위 안에 든 것들의 정확한 복사 이미지로 만들었다. 말한 대로, 당신은 밖을 향해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세계가 당신의 마음속에 재생되고 있고, 당신은 그 마음속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꿈을 꾸고 있을 때와 실제로 그리 다르지 않다. 꿈꿀 때, 이미지는 마음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P90)
감각이 포착해서 마음이 재생시켜 주는 그 부분만을 경험하는데, 심지어 그 감각조차 이미 나의 삶의 경험들로 인해 이미 호불호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왜곡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그 일부분조차도 진실이라고,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내가 안다고, 내가 맞다고, 내가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세상엔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을 나의 냥이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반려(伴侶)라는 말의 뜻은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짝’이라고 한다. 나의 아지와 냥이는 집순이 집사를 기어코 밖에 나가 코에 산의 공기도 넣게 해 주고, 길에서 만나는 다른 생명에게 관심을 갖게 해 주고, 부족한 집사를 깨닫게 하여 또 한 걸음 성장하게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쓸 때는 조용히 주변 어딘가에 머물며 온기를 나눠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함께 좋은 벗이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중이다.
PS 1. 반전이 있었다. 냥이는 자율급식 3일째 되는 날 기어코 100g을 먹었다. 녀석은 심심하면 밥을 먹는다. 살이 더 찌고 있어 6kg를 넘겼다. 이대로 둬도 될지 집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PS2. 사료가 많음을 인지시키기 위해 사료통 뚜껑을 열어 두었다. 냥이는 사료통에 매달려 사료를 몇 번 집어 먹기도 했으나, 밥그릇에 사료를 달라고 졸라댔다. 고상하게 밥그릇에 담긴 사료를 먹는 걸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