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은 그리움이었다
긴 설 연휴,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길게 고향에 내려갈 수 있을까 싶어 금요일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연휴 시작 전 평일이고, 연휴가 길어 아직 귀성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없는 것인지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여유롭게 고향집에 도착하여 별 것도 없이 많은 짐을 내리고 정리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되어 아빠, 엄마와 세 식구가 조촐하게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나는 집에서 구워 먹는 고기가 제일 맛있다. 집에서 직접 담그신 된장이 있고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주시는 싱싱한 김치 한 포기를 꼭지만 잘라 내 앞에 놓아주시면 나는 익은 고기들을 김치 위에 올리고 김치를 돌돌 말아 한 입 가득 넣어 우물거리고 먹는다. 봄이면 엄마가 노지에서 캐 오신 달래를 마늘처럼 넣어 같이 쌈을 싸 먹기도 하고 여름과 가을이면 텃밭에서 키운 채소들로 풍성한 한 상이 차려진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 댁에 가는 날은 으레 저녁 메뉴는 고기 굽기가 된다.
저녁을 잔뜩 먹고 편히 실컷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곧 아침 식사가 준비된다. 여전히 소화가 안 된 것처럼 더부룩할 때도 있지만 나는 엄마가 차려주시는 아침을 먹기 위해 또다시 앉는다. 그저 엄마가 퍼 준 밥을 조금 덜 뿐, 아침에 밥을 가장 먼저 먹으면 혈당이 급히 올라가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다 잊어버린 채 시골에 있는 동안은 양껏 먹는다. 어차피 잡곡밥이라 괜찮다,라고 나름 위로해 본다..
이번에도 다음날 아침 여지없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아침밥을 먹으려 앉았는데 어릴 때 엄마가 자주 해 주시던 냉잇국이 놓여 있었다. 아빠가 쉬시면서 며칠 동안 윗동네 밭에 가서 캐 오신 냉이로 끓인 국이었다. 시골에 가기 전 엄마와 통화를 할 때, 아빠가 냉이를 많이 캐 오셔서 하루종일 냉이를 다듬으셨다며, 너희 아빠가 엄마를 쉬지 못하게 한다며 웃으셨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엄마의 냉잇국을 먹었다. 봄이면 된장찌개에 캐 오신 냉이를 넣어주시긴 했었지만, 콩가루에 냉이를 묻혀 농사지은 가을무와 함께 끓인 냉잇국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무 맛있어!”를 연신 말하며, 나는 3일 동안 아침마다 냉잇국을 먹었다. 엄마의 음식은 언제나 그립지만, 이렇게 어릴 때 먹다가 한동안 안 해 주셨던 음식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엄마가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냉이를 다듬었다. 노지에서 캔 냉이는 잔뿌리도 많고 잎색깔도 좀 더 불그레하다. 냉이를 다듬기만 해도 냉이향이 올라온다. 큰 것도 있고 정말 작은 것도 있고 크기도 들쭉날쭉 모양도 균일하지 않지만 향만큼은 마트에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향긋하다.
어릴 때는 겨울이면 호미를 들고 동네 아무 밭에나 가서 냉이와 달래를 캐 오곤 했었다. 그러면 엄마는 아빠에게 밭에 묻어 둔 무 하나를 꺼내 오라고 하셨고, 냉잇국에 쓰고 남은 무를 아빠에게 다시 주시면 우린 둘러앉아 아빠가 깎아 주시는 무를 과일처럼 먹곤 했었다. 겨울날 그렇게 둘러앉아 받아먹었던 가을무는 달디달았다.
옛날이고, 시골이고, 별다른 간식거리를 먹을 만큼 풍족하지 않았기에 담을 수 있는 풍경들.. 엄마는 가난하게 키워 늘 마음에 미안함이 남아 있다고 하시는데, 다른 형제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크게 가난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굳이 가난을 기억하자면 도시락 반찬에 다른 친구들처럼 소시지나 햄 같은 반찬이 거의 없었다는 것 정도이다. 아마도 잘 몰랐거나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나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니 어릴 때의 모든 것들은 그리움으로 남을 뿐이다.
명절마다 꽉꽉 막히는 도로와 긴 귀성 행렬들을 뉴스로 보며, 또 내가 겪으며, 나는 명절마다 고향집을 찾아가는 이유가 뭘까 늘 궁금했었다. 습관처럼 당연히 고향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시골로 내려가긴 했지만,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길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냉잇국을 먹다 보니, 그건 아마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 오일장에 가서 명절 전 북적북적한 사람들을 느껴보고, 할머니들이 직접 만드셨다는 과상(과즐)을 사 와 들락거리며 입에 넣어 우물거리고, 냉이를 다듬고, 다듬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친척들과 지인들의 집에 인사를 가고 안부를 묻고,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그리움으로 마음 깊은 곳에 남아 명절마다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가족도 있고, 명절에 일을 해야 하는 가족도 있고, 또 다른 친척이나 지인의 부고 소식에 급작스레 오지 못하는 되는 가족도 있어 옛날처럼 명절이라 해도 집이 북적거리지 않을 때가 많다. 설이면 모든 가족들이 모여 만두를 빚고, 추석이면 모여 송편을 빚는 풍경은 이제 우리 집에서는 보기 드물다. 그립고 또 그리운 풍경들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잊고 있었으나 그리웠던 엄마의 냉잇국을 먹지 않았는가. 엄마가 만드신 식혜를 욕심을 부려 세 병이나 싸왔고, 생각날 때마다 쌀알이 잘 섞이게 병을 흔들어 컵에 따르고 부모님이 일일이 까서 보내주신 잣을 몇 개 띄워 호로롭 마신다.
그리울 음식들, 그리울 사람들, 그리울 풍경들.. 그리워할 것을 알고 있기에 지금 충분히 양껏 먹고 얘기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본다.
그리움은 사랑이 있던 모든 자리에, 모든 시간에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여전히, 함께 하는 이곳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