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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호영 Sep 02. 2021

히바_낙타가 되어 가리라 7

밤의 성벽



히바의 여름은 해가 늦게 집니다. 저녁을 먹고 후줄근해진 기운을 쇄신할 겸 새 옷으로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밤의 이찬 칼라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서문에는 불이 켜져 황금빛 야경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성벽 위에도 전구를 달아서 대바늘 뜨개질의 코가 풀린 듯한 동글동글한 곡선이 수평으로 뻗어 있습니다. 밤의 히바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습니다.       

   

불이 켜진 서문. 밤의 이찬 칼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많다.


주마 모스크 미나렛으로 가는 길의 성벽에 걸린 전구의 불빛이 벽면에 쌍곡선을 만들어냈다.

서문으로 들어서 낮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칼타 미나렛을 지나고 주마 모스크를 지났습니다. 밤의 히바에서는 어둠 속에 잠기지 않은 것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구 불빛을 받는 미나렛, 띄엄띄엄 걸린 불빛을 받는 성벽. 낮엔 미처 보지 못한 보도블록의 무늬도 아름다웠습니다. 팔각형과 사각형이 반복되는 무늬, 넓적한 연 모양과 좁은 연 모양이 어우러져 사각형을 반복하는 무늬.


성벽에 걸린 전구에서 나오는 불빛은 사방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성벽에 부딪혀 벽면에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 윤곽은 원뿔곡선입니다. 언젠가 어두운 길을 갈 때, 랜턴을 바닥에 비추며 놀이를 한 적이 있지요. 갓을 쓴 전구를 바닥에 수직으로 비추면 불빛은 원 모양이 됩니다. 전구를 바닥에 평행하게 하면 쌍곡선이 만들어집니다. 수직도 아니고 평행도 아닌, 그 사이에서 어슷하게 놓으면 각도에 따라 타원, 포물선이 만들어집니다. 빛의 마술로 네 종류의 원뿔곡선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지요. 땅을 향해 걸린 전구에서 나오는 빛은 이찬 칼라 성벽에 쌍곡선을 드리웁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성벽으로 올라가는 길은 북문 옆에 있습니다. 성벽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북문으로 갑니다. 가끔 불이 켜진 집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말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슬리퍼를 신고 집 앞에서 뭔가 정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찬 칼라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낮에 히바를 다닐 때는 히바의 풍경이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밤에 히바를 걸으니 히바의 기운이 몸에 스며듭니다. 내 몸을 스치는 청량한 바람에 수백 년 전 히바 사람의 숨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합니다. 


북문에 다다르자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폭이 꽤 넓어 마치 언덕길처럼 보입니다. 성벽 높이만큼 올라가자 평탄한 길이 깔려 있습니다. 폭은 좁아졌다 넓어졌다 합니다. 성벽 위에 낮에 보던 것처럼 규칙적으로 둥글게 돌출부가 있습니다. 옹성입니다. 세 번째 옹성에서 멈췄습니다. 바닥에 기대앉아 성안을 바라봅니다. 밤하늘에 별이 없습니다. 기대와 달리 별이 없으니 토프락 칼라의 유르트에서 하룻밤 자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사막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 은하수가 나를 덮칠 것 같은 밤을 보냈어야 하는데.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얇은 겉옷이라도 가져왔으면 성벽에 기대앉은 이대로 하룻밤을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 멀리 보이는 미나렛에 예전에는 횃불을 피워놓았을까요? 사막을 가로질러 오는 대상들을 위해 등대 역할도 했다니 지금처럼 미나렛 온몸으로 불빛을 내비치지는 못해도 가장 높은 창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밤새 꺼지지 않을 불을 피워놓았겠지요. 낙타를 타고 오는 대상들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시인의 「낙타」라는 시를 미나렛의 횃불을 바라보며 낭독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읽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 밤입니다.  

    

서문 밖 어둠 속의 알 콰리즈미      


밤이 깊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은 성벽 위에 남겨 두고 터덜터덜 내려갑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서문으로 걸어갑니다. 서문 밖 정면으로 뻗은 도로에 뭔가 줄줄이 걸려 있는 것들이 펄럭입니다. 궁금증이 일어 도로를 건너가 보았습니다. 아, 알 콰리즈미입니다. 그다음은 알 비루니이고요.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학자임에는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자는 읽을 수 없어도 우즈벡 사람들의 자부심은 느껴지는 이상한 밤입니다.         


이찬 칼라 서문 밖 도로에 걸린 알 콰리즈미와 알 비루니. 십여 명의 학자들의 초상화가 도로를 따라 걸려 있었다

     

택시를 타려고 다시 서문 앞으로 오는데, 서문 바로 바깥에 몇몇 사람들이 옹기종기 서 있습니다. 우리 일행이 나누는 말을 들었는지 한국말로 말을 걸어옵니다. 한 남자가 대구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말이 유창합니다.      


아들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맞았을 때, 시골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낯선 곳에 일주일 머물며 자립심을 키우게 할 요량이었지요. 소개받은 곳은 파프리카 농장이었습니다. 아들은 그곳에서 파프리카를 집어 놓은 집게를 푸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파프리카는 줄기가 약해서 천정에서 내려오는 줄에 집게를 집어 잡아 주어야 한답니다. 파프리카를 따는 일이나 집게를 집는 일은 숙련된 사람들이 하고요. 그곳에 몽골 청년들이 네 명인가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파프리카 재배 기술을 배우는 중이었다고. 이젠 그런 농촌에 가도 우즈벡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서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한국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다행히 서문 밖, 한국말이 유창한 나이 든 남자는 한국에 다녀온 몇 년이 형편이 피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 친절한 듯합니다. 택시를 잡아 주겠다며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알고보니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즈벡 남자들은 야경을 즐기는 관광객들을 태우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택시는 정말 쏜살같았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의 총알택시는 저리가라입니다. 직선도로는 물론 ㄱ자로 꺾는 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얼마나 긴장했던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뻣뻣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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