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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Aug 22. 2019

사라지는 기억들, 가라앉는 섬들

이탈리아 여행일지

사라지는 기억들, 가라앉는 섬들


겨울에 찾은 베니스는 바다 바람이 불어  추웠다. 50유로라는 그닥  가격도 아닌 돈에 침대  자리를 얻었다.   누일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홀로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배웠다.


노출된 오래된 파이프들과 녹이 슬대로  라디에이터를 보며  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할  있었다. 저녁은 다른 배낭여행하는 여자의 침대를 지나 문을 열면 바로 나오는 높은 천장에 아주  테이블이 있는 공간에서 먹을  있었다. 배낭여행자들은 근처 식료품점에서 사 온 치즈와 , 와인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대신하기도 하고 직접 파스타나 샐러드 같은 조리하기 쉬운 음식을 공용 주방에서 만들어서 먹기도 했다.


나는  방을 찬찬히 돌며 먼지 쌓인 골동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피아노 덮개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악보들을 슬쩍 뒤져보기도 했다.


룸메이트의 침대는 풀지 않은 가방만 덩그러니 놓인  주인 없이 비어있었다. 아침 일찍 베니스 주변 섬들을 돌아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불을 끄고 누우니 일기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 귀찮지만 다시 불을 켠다. 기억을 잃기 싫기 때문이다. 기록하지 않은 것들은 사라져 버린다. 오감으로 강렬하게 와닿는 게 아닌 아무리 사소한 기억이라도 볼펜을 꾹꾹 눌러 기록하는 순간 우리 영혼에  꾹꾹 눌러 저장된다.


오랜 세월 뒤에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하고 우쭐했던 순간이 아닌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영혼을 쉬게 해 주었던 순간들이라는  알게 된다. 우리는  순간들을 머릿속으로 영사하며 행복감을 다시 맛본다. 그게 인생을 사는 에너지가 된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룸메이트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로 호스텔을 나선다. 상쾌하고 날카로운 겨울 아침 공기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감을 일깨워 주었다.


이탈리아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베니스는 처음이었다. 지난밤늦게 도착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시를 지나며 감싸고 있는 청록빛 바닷물과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돌길과 작은 다리들을 눈에 담으며 배가 떠나기로  항구로 걸음을 재촉했다.


베니스 석호에는 작은 섬들이 많다. 베니스가 그중에서는 가장  섬 일정도로 소규모의 시골 섬들이지만 각자의 개성과 색깔이 뚜렷하다. 무라노는 주민이 오천 명정도 되는 작은 섬마을이지만 13세기부터 유리공예로 유럽에서 유명했던 지역이다.


베니스에 살던 유리공예 장인들이 화재의 위험 때문에 모두 무라노로 강제 이주한 것이 13세기 초이다. 세월이 흘러 15세기에는 베네치아 인들의 떠오르는 휴가지로 많은 궁전들과 대저택들이 지어졌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없다.


작은 배에서 내려 섬에 당도하자마자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유리공예 상점들이 보였다. 아드리아 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한 산호초, 오징어, 독수리와 갈매기 등의 작품을 하나하나 눈으로 구경했다. 추운 날씨에 옷을 겹쳐 입은 탓에 둔한 동작으로 혹여 유리 작품들을 깨트리는 건 아닐까 들어가지도 않고 조심스레 쇼윈도 밖에서 섬세하고도 연약한 작품들을 눈에 담았다.


더 둘러본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베니스의 인파를 피해 사색하며 마을을 걷기에 참 좋았다. 겨울바람의 쓸쓸함도 여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이 순간과 공간을 마음에 더 깊이 담아놓기 위해 추위에도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좁은 골목길을 탐험하는 고독한 여행자가 되어 무라노 섬을 방황했다. 작디작은 섬인 만큼 Must-see List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닿는 대로 소박하고 꾸밈없는 공간에 자유롭게 존재했다.


정처 없이 걷는데 어디선가 온기가 나의 시선과 발걸음을  자리에 묶었다. 커다란 초록색 철문 사이로 이글이글한 불이 끓고 있는 용광로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스스럼없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철문을 살짝 밀고 들어가자 할아버지의 작업장인 듯한 용광로와 녹이 슬대로  양동이들, 그의  밑으로 아름답게 부서진 색색의 유리조각들이 보였다. 어지럽혀진 작업장 사이로 할아버지는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불과 유리로 창조하는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손길도 아무렇게나 놓여진 잡동사니도 몇십 년의 세월을 짐작할  있을 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다.  세기 동안 수많은 장인과 작업장이  무라노라는 섬을 살다 갔을 것이다.



정신없이 할아버지를 구경하는 사이 타오르는 혜성 같은 유리 뭉치는 아직도 배에 불을 품고 있는 멋진 말로 변했다. 할아버지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쇠막대 끝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말을 보여줬다. 할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독백을 했다.


“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서는 안 돼요. 언제 깨질지 모르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지만.”


조심조심 유리를 대하는 태도가 주가 된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생의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대하고 다루고 있었다.


무라노를 떠나 부라노로 향하는 배를 탔다. 부라노 역시 베니스 석호에 있는 작은   하나로 베니스에서는 배로 40 정도 걸린다.


수세기 동안 레이스 장인들로 유명했던  곳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색채가 풍부한 장소  하나 꼽히며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집들로  유명하다. 초록색 창문들이 활짝 열려있는 새파란 , 분홍색  앞에 쪼르르  있는 황토색 화분들, 민트  벽에 흩날리는 하얀색 빨래들.. 나는 실수로 동화  마을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들떠 비현실적인 풍경을 즐겼다.


11, 겨울의 잿빛에 지겨워지려던 찰나 색색깔의 시각적 자극이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두서없이 크레파스로 칠해진 그림 같은  섬에도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섬에 있는 거의 모든 건물이 거주지인데 집의 색깔을 바꾸고 싶다면 주인은 이탈리아 정부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하고 정부는  집이 바꿀  있는 색깔들이 뭔지 알려준다고.


작은 집들과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은 동화책처럼 짧았지만  여운을 남겼다. 나는 부두에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통발과  안에 잡혀있는 게들, 느긋하게 햇빛을 즐기는 길고양이들을 구경하며 오후를 보냈다.



부두에 앉으니 베니스 석호에 쓸쓸하게 떠 있는 많은 작은 섬들이 보였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버려지는 작은 섬들은 군도의 숙명일까. 베니스에 머물다 들린 관광객들과 터를 보존하는 주민들로 인해 유지보수가 되는 무라노와 부라노 섬에 비해 허물어진 수도원들, 잡초가 마구 자란 정원들, 무너진 벽들로 가득한 섬들은 아무도 찾지 않았다. 베니스 주민들은 이 섬들을 귀신섬이라고 불렀다.


한 때 수많은 배와 사람들이 방문했을 이 섬들은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천천히 그 모습을 잃고 지금의 황량한 바위섬들이 되었다.


지금  순간에도  섬들은 바람과 파도에 의해 부식되고 침식되어 사라져 가고 있을 것이다.  섬들이 정말 마지막 모래로 흩날려가면 물속 깊이 가라앉으면 누가  섬들을 기억해줄까?  섬들을 지나갔던 수많은 사람들과 기억들은 어디에 남는 것일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세상을 스쳐 소멸의 길로 간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을 한다.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했었을 사람과 사건과 기억을 추억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신문 부고란에 기록으로 남는데  섬들이  죽으면  기록은 어디에 남을까?


이 보잘것없는 섬들을 쓸쓸하게 여긴 한 사람이 직접 배를 저어가며 이 섬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The Abandoned Islands of the Venetian Lagoon이란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7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아름답고 사랑받는 베니스가 아니라 쓸쓸하고 황량한 그 섬들이다. 그 쓸쓸함과 사라져감을 잊지 않으려 나는 기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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