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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Jan 06. 2023

비 내리는 작은 섬

스페인 메노르카에서 1

영국으로 이사 오고 첫 여행이었다. 패링던역에서 기차를 타고 갯윅 공항에 도착했다. 스페인 항공사 부엘링에서 티켓을 샀는데 이상하게 나만 온라인 체크인이 되지 않았다. 한국인만 그런가 싶어 네이버에 검색해 봤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글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체크인을 하지 않은 대역죄인들과 함께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 남편은 미국인이 되고 싶지 않냐고 오천 번째로 물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신토불이라고 말했다.


부엘링 카운터에는 행동거지가 아주 느긋한 직원 한 명뿐이었다. 미리 체크인을 하지 않은 대역죄인들은 비행기를 놓칠까 봐 다들 신경쇠약증상을 보였다.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 겨우 티켓을 발권받고 미친 듯이 뛰었다. 갯윅공항을 십 분 만에 돌파해서 겨우 비행기에 올라탔다.


세 시간 만에 메노르카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비가 내리는 어둡고 조용한 섬을 구경했다. 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인적도 드물었다. 어두침침한 풍경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무 이유 없이 설렜다.


호텔 직원은 아멜리아라는 이름의 마른 여자였는데 완전히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배정받은 방은 사진에 영 못 미쳤다. 아멜리아에게 오션뷰라고 해서 가장 비싼 방을 예약했는데 1층이라 경치가 별로라고 다른 방은 없냐고 물었다. 그녀는 남은 방들을 다 보여줬고 우린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3층 방을 골랐다. 1층 방과는 천지차이였다.


보통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건 남편 담당인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이날은 내가 직접 요구했다. 남들을 곤란하게 하거나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손해를 보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상대의 반응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부드럽고 유머스럽게 요구하는 남편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얻는 것은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직원이 그렇게 기분 나빠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사실 정당한 것을 요구했을 때 귀찮아하고 기분 나빠하는 게 더 이상한 거고 그래봤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남편은 도착하자마자 미팅을 해야 했다. 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돈키호테를 읽었다. 택시 안에서 본 건물은 빛바랜 벽에 페인트로 듬성듬성 식당 이름이 쓰여있었는데 산초 판자였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대부분의 식당과 가게가 이미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우리는 기차에서 먹은 샌드위치 이후로 쫄쫄 굶은 상태였다. 비는 주룩주룩 기세를 더해갔다.


9시가 넘어서야 다행히 비가 그치고 우리는 호텔을 나서 촉촉한 거리를 걸었다. 구글과 다르게 중국 아저씨가 하는 가게가 아직 열려있었고 안 파는 게 없어서 치약, 공항에서 뺏긴 선크림, 과자, 물 등등을 샀다. 영국에서 온 청소년들을 만나 잡담을 나눴다. 밤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길고양이들만 나른하게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었다. 작은 섬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유일하게 열려있는 티오의 집이라는 타파스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테라스에 앉았는데 비가 와서인지 바람이 조금 찼다. 남편이 겉옷 챙기라고 하는 걸 무시했는데 조금 후회가 됐다.  옆자리에는 맨체스터에서 왔다는 영국인들이 있었는데 여기 임대 건물이 있어서 자주 온다고 했다. 좋은 인생이라며 부럽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억센 만큐니안 악센트로 친절하게 메노르카에서 가볼 곳들을 알려주었다.


좀 춥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버가 추우면 안으로 자리를 옮겨주겠다고 먼저 센스 있게 얘기해 줘서 무척 고마웠다. 스페인 사람이라는데 얼굴은 동양느낌에 말투는 영국사람 같았다. 영국에서 지낸 건 고작 8개월이라는데 언어에 탁월한 것 같았다. 아니면 섬에 영국인들이 많아서일까? 그녀의 싹싹하고 친절한 분위기와 에너지가 너무 좋았다.



음식도 최고였다. 런던의 거의 반값이었는데 모든 메뉴가 맛있고 훌륭했다. 바삭한 바게트 같은 식감의 볼리요 빵 위에 토마토 잼을 바르고 얇게 저민 세라노 햄이 올라간 타파스는 비린 맛은 감칠맛이 났다. 같은 크기로 깍둑 썰린 페타치즈와 딸기, 비트루트가 섞인 샐러드는 새콤달콤하면서 입맛을 돋워주었다. 홈메이드 크로켓은 바삭하면서도 크리미했고 상그리아도 항아리 듬뿍 나왔는데 끝내주는 맛이었다.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비가 그친 신선한 거리를 걸어서 호텔로 돌아가는 기분이란⋯⋯ 싱잉인더레인이 절로 흘러나왔다.


씻고 나서 더블 침대인척 하는 싱글침대 두 개에 누워서 돈키호테를 마저 읽었다. 남편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스페인어로 나오는 대부를 시청했다. 스페인어와 총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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