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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Jan 09. 2023

모든 만남은 우리를 바꾸어 놓는다

스페인 메노르카에서 2

눈뜨자마자 얼굴만 씻고 모자를 눌러쓴 채 아침을 먹으러 갔다. 쓰리스타 호텔이라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아침식사가 은근히 실했다. 샐러드는 오이, 당근, 비트, 양상추, 올리브, 토마토, 옥수수 등등 기본적인 것만 준비되어 있었는데도 아주 맛있었다. 빵, 베이컨, 콩, 커피 머신과 주스 머신 등 기본적인 차림이었지만 맛은 오성급 호텔들 못지않았다.



스페인 음식이랑 잘 맞는 취향이라서일까? 십 년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감자가 많이 들어간 스패니쉬 오믈렛은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애 가장 맛있게 먹은 아티초크 요리도 스페인 지로나에서였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소량만 맛보는 타파스 스타일도 내 취향이고 해산물과 밥 킬러인 나에게 빠에야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식당에서는 작은 만을 뚫고 들어온 바다와 그가 만든 해변이 보였다. 호텔 앞에 있는 레몬트리에는 알알이 실한 레몬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메노르카는 뭐든 실한 곳이라는 나만의 감상이 생겼다.



계획 없이 여행하는 우리 부부는 아침을 먹고 방에 틀어박혀 렌탈카를 알아봐야 했다. 물론 미리 예약을 안 해서 가격도 비싸고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깝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체념한 부분이기도 하다.


샤워를 하고 선크림을 듬뿍 발라주었다. 그리고 렌탈카를 빌려서 근처 마혼이라는 시내로 향했다.



여행 첫날이라 그런지 걷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지중해 특유의 노랗고 하얀 건물들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가 보였다.


작은 갤러리를 발견해서 들어갔는데 실로 눈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언젠가는 여행을 하며 만나는 예술품을 턱턱 사서 집에 보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아쉽게 돌아섰다.


보기만 해도 해묵은 감정들이 소화될 것 같은 항구 뷰를 구경하고 다른 갤러리에 들어갔다. 근데 아직 오픈한 곳이 아니라 공사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여러 국적의 아티스트들이 첫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줬다. 다들 어떻게 이 작은 섬에 흘러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일부러 바깥에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태양과 바람이 힘겨루기를 심하게 하고 있어서 여러 번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남편은 늘 그렇듯이 옆 테이블 사람들한테 말을 걸었다. 근데 그 사람들이 다짜고짜 너희 땡땡 호텔에서 머물고 있지?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이유 없이 긴장을 했는데 아침 식사시간에 우리를 본 같은 호텔 투숙객일 뿐이었다.


그들 역시 영국인이었다. 우리가 최근에 런던으로 이사 왔다고 하니 다짜고짜 런던은 쇼핑 빼면 별로야!라고 했다. 맨체스터 사람들은 런던에 라이벌의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런던은 절대 영국을 대표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해서 참 신기했다. 우리도 서울만 한국인 건 아니니까. 서울을 제외하고 한국 전체를 보면 어느 표어처럼 다이나믹 코리아가 따로 없다. 그런데 또 서울이 한국의 정체성과 이미지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맞는 말이고… 영국도 런던 없이는 영국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런던만 보자면 절대 영국을 대표할 수는 없고.. 아무튼 그 말이 신기했다. 나도 외국인들이 서울만 보고 한국을 안다고 하면 아마 흥분할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서 내가 시킨 조기 요리와 남편이 시킨 이베리코 돼지가 나왔다. 재밌었던 것은 웨이터가 조기를 농어라고 잘못 말했는데 나중에 매니저가 나와서 수첩에 직접 물고기 그림을 그려서 정정했다는 거다. 그는 자기는 어부니까 믿으라고 말했다. 웃겼던 건 정작 나는 조기나 농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고 먹을 줄만 안다는 거다.



음식은 역시 끝내주게 맛있었다. 남편은 자기가 살면서 먹은 이베리코 돼지요리 중에 최고라고 했다. 나는 으깬 계란과 토마토 절임, 올리브가 같이 나온 러시안식 샐러드가 가장 맛있었다.


서비스로 나온 상그리아와 함께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는데 자꾸 옆 테이블에 눈이 갔다. 꼬마 여자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는데 남자는 휴대폰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고 아이는 심심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쩐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는데 여자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내 뒤에서 여기는 나의 집이야 라고 프랑스어로 말하는 걸 들었다. 이게 너희 집이야?라고 묻자 화분을 심어놓은 작은 조형물을 가리키며 수줍게 웃었다.


안 그래도 유럽에 오고 다시 프랑스어를 연습하고 싶은 의욕에 충만해 있었는데 꼬마라면 대화가 통할 것 같았다. 아이도 프랑스어로 말을 걸자 옆에 와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6살 스텔라는 휴대폰처럼 생긴 장난감을 목에 걸고 다녔는데 조금 친해지자 그 안에 저장된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줬다. 계속 등장하는 여자 사진을 보고 엄마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태도부터 시작해서 사연이 있는 집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우리가 계산서를 받을쯤되자 남자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다행히도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노마드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설립했고 본인도 마르세유에서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파티에 초대까지 해줬다. 역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느꼈다. 스텔라는 떠나는 나의 손에 꽃을 쥐어주었다.


상그리아에 살짝 취해서 산책을 하다가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길래 남편과 살짝 뽀뽀를 했는데 연애 때 설렘이 느껴져서 신기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취기가 올라서인지 여행 중이라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때 뉴욕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또 총기 난사 사고가 났다고 해서 평화로운 한낮에 균열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혼 탐방을 이쯤에서 마치고 호텔 근처 해변에 가기로 했다. 계단이 가팔라서 내려가다 잠시 쉬는데 그늘에 누군가 누워서 쉬고 있었다. 인상이 좋은 그녀의 이름은 데시레(Desiree)였다. 코와 귀에 매달린 피어싱이 달랑거리고 머리는 가닥가닥 떡이 져 있었다. 역시 영국에 사는 그녀는 지난밤 동굴에서 잤다고 했다. 테이블과 의자처럼 생긴 돌이 있어 아주 편했다고... 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고 혼자 그런 데서 자면 무섭지 않냐고 슬쩍 물었다. 그녀는 나는 암벽등반가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기 힘과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나는 그 짤막한 대답의 본새에 감탄했다.


올리브맛 감자칩을 먹으며 모기에 뜯긴 다리를 벅벅 긁는 그녀는 오늘밤도 공항 근처에서 잘 거라고 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어서 그녀가 순식간에 좋아졌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녀는 나에게도 특별한 장소인 스페인 지로나 출신이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연락처를 묻지는 않았다. 여행하다 보면 이렇게 세렌디피티 같은 만남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연락을 해도 언젠가는 흐지부지 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만남의 신선함과 운명적인 느낌도 희석 돼버리고 만다. 비포선라이즈의 주인공들도 그래서 연락처를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꼭 안아주며 I must love you and leave you라고 하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나는 아직도 그 강렬한 첫 만남 속의 그녀 모습대로 그녀를 기억한다. 데시레는 영원히 건강하게 잘 익은 올리브 같은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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