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메노르카에서 3
여행할 때마저 게으른 우리 부부는 아침 10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조식시간이 얼마 안 남아 후다닥 씻고 아침을 먹은 뒤 바로 해변으로 떠났다.
메노르카는 이웃섬 마요르카에 비해 훨씬 크기가 작다. 이름부터가 더 작은 섬(smaller island)을 뜻한다. 그래서 좀 만만하게 봤는데 막상 차를 타고 달려보니 섬을 속속들이 다 보려면 일주일은 족히 필요할 것 같았다.
가장 가고 싶었던 해변은 차로 40분은 달려야 닿는 곳에 있었다. 메노르카에는 크고 작은 해변이 많은데 대부분이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고 대부분이 배가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섬의 대부분은 인간의 손때를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다. 그 투명하고 넉넉한 풍경을 즐기다가 해변으로 가는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다. 한참을 제주도가 떠오르는 좁은 돌담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그런데 불안하게 자꾸 반대편에서 차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끝까지 가니 경찰들이 길을 막고 서있었고 오로지 버스로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해변 표지판이 있던 길목 초입에서 알려줬다면 좋았을걸. 급하게 다른 해변을 물색해야 했다.
구글에서는 분명 차로 접근 가능한 해변이라고 했는데도 이런 걸 보니 그냥 끌리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를 해도 현지 사정은 다르기 마련이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심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유연하고 쿨해지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도 고생스러운 여행을.
작은 섬 메노르카에는 작은 만이 즐비한데 다들 어엿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섬 안으로 한 발짝 들어온 푸른 바다를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해변 못지않게 아름답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쁜 물색깔에 환호성이 나왔다. 영롱한 터키석 색의 바다가 좁고 길게 들어와 있었고 절벽 여기저기 사람들이 늘어져 있었다. 천국의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지나 끝까지 걸어 들어가서 바다랑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초여름의 햇살 아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빛났다. 하늘도 바다도 오차없이 완전한 푸른 빛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풍경이었다. 잠시 그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소였다.
그것도 잠시 딱딱한 돌 위에 누워 지글지글 타고 있자니 불판 위 삼겹살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야자수나 파라솔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기에 더위를 피하려면 물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절벽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물로 뛰어드는 걸 보고 있던 참이었다. 3층 건물 높이에서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있던 절벽은 그다지 높지도 않았는데 막상 뛰려고 하니 가슴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물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맨발로 이글이글 달궈진 절벽을 한참 돌아가서 물가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것.
번지점프대에 선 사람들처럼 한참을 망설였다.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질 때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남편 손을 잡고 뛰어내렸다. 옆에서 가슴을 내놓고 일광욕을 즐기던 여자가 박수를 쳐주었다.
해냈다는 기쁨도 잠시 얼음장 같은 물에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얼어붙었다. 설상가상 물은 보기보다 훨씬 깊었고 당연히 땅에 발도 닿지 않았다. 놀란 심장은 튀어나올 듯이 쿵쿵대고 숨이 너무 가빠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수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 물 위에 떠있느라 계속 몸을 움직이다 보니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뭍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건너편 사다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매달리다시피 의지해서 겨우 사다리에 닿았다. 절벽에 기어올라가 겨우 숨을 헉헉 내쉬었다. 차가워진 몸이 덜덜 떨렸다. 방금 전까지 따갑게 느껴지던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도 없었다. 우리 자리로 돌아가려면 역시 맨발로 절벽을 한참을 돌아서 가거나 수영을 해서 건너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쉬면서 몸이 데워지자 큰맘 먹고 들어가려고 발가락을 담갔는데 물온도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도망 나왔다. 사시사철 따뜻한 카리브해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쇼크 비슷한 증상을 겪고 다시 물에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용기를 필요로 했다.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다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다들 자유로이 화창한 여름과 바다를 즐기고 있는데 이렇게 비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에게 천국같은 풍경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연인의 면모로 노는 호방한 유럽인들 사이에서 나는 진정 쫄보가 따로 없었다. 대학생 때 쪼다와 내 이름을 섞어 부르던 아는 오빠에게 종종 앙심을 품었는데 그의 눈이 정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려고 굳게 마음을 먹을수록 경직되고 긴장이 됐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는 안전하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천국 같은 곳에 올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나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신이 가호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생애 동안 지구에서의 삶을 즐기려면 좀 더 긍정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망설이는 나의 눈앞으로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물은 얼얼하게 차가웠고 물살은 거셌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물속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여쁜 물고기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러나 천천히 스노클링을 하기에는 5월 유럽의 바다는 너무 차가웠다. 반대쪽 사다리에 닿는 것에 집중해서 신중하게 호흡을 고르며 나아갔다.
발바닥에 화상을 입는 고통을 감내하거나 계절이 무색하게 아릿한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용기를 내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는 순간들.
이렇게 등 떠밀려서 점프하지 않으면 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여행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게 시린 물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개운해졌다. 삶이 등을 떠밀 때 용기가 되어줄 기억이 하나 더 생긴 순간이었다.
그러나 뛰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온 세상이 다 나에게 뛰라고 악을 지른다 해도 나의 소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 말이다.
멕시코에서 자연절벽이 있는 워터파크에 갔을 때였다. 내 뒤로 줄을 선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절벽에서 성급하게 뛰는 바람에 배로 착지하고 말았다. 배와 수면이 부딪치면서 뻑소리가 났다. 하루종일 배가 얼얼하고 아팠다. 그 뒤로 목 디스크 통증이 더 자주 찾아왔는데 아예 연관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불편한 천국에 안녕을 고하고 가는 길에 점프를 하려고 간을 보는 청소년들을 마주쳤다. 5층 건물 높이의 절벽이었다. 빼빼한 소년들 중 가장 앞에 선 아이는 절대 겁쟁이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뛰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나 보이는 친구들과 우리처럼 지나가던 구경꾼들을 훑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작 몇 시간 전 그와 같은 심정이었던 나는 안 뛰어내려도 돼.. 그래도 괜찮아라고 속으로 응원했다.
그는 결국 두려움을 이겨내고 엉성한 자세로 뛰어내렸다. 나처럼 삼십 대가 되어서 목 디스크와 요통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뛰어내리지 않고는 못 배길 분위기라는 걸 알지만 그의 겁먹은 어린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난 안 뛸래라고 쿨하게 말하는 용기를 내기를 내심 바랐다. 뛰는 것도, 뛰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용기를 요한다. 산다는 건 가만히 숨만 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천국을 떠났다. 냉탕 같은 바다에서 허우적 대는 사이 몰려온 피로때문일까, 안타깝게도 내 세계관은 다시 비관적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