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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May 01. 2024

보이지 않는 수호자들

노르웨이 여행 레코드

오로라는 초록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회색 곡선에 가까웠다. 모닥불이 꺼지기 직전의 가느다란 연기 같았다. 저게 오로라라고? 카메라를 갖다 대자 선명한 초록색 오로라가 하늘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트롬소의 한 항구에서 북극의 공주라는 배에 올라탔다. 노르웨이 북극권에 자리한 트롬소는 북극이랑 가까운 만큼 오로라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인 선장은 미소 한 번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안전 수칙을 설명했다. 노르웨이인들은 생각보다는 친절했지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선장의 건조한 절차가 끝나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는 잔잔한 수면을 가르며 피오르 위를 미끄러지듯 항행했다. 양쪽으로 야트막한 산맥을 뒤로하고 불이 켜진 집들이 쪼르르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낮에 눈 덮인 하얀 산맥을 장식하던 알록달록한 스위스 스타일 집들이 밤에는 마치 흩뿌려진 별빛 같았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쪽빛 밤하늘은 더 짙어졌고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너무 추워서 얼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선상에서 버티지 못하고 따뜻한 실내로 들어왔다. 알 수 없는 항해코드가 떠있는 스크린이 있는 조종실과 작은 부엌, 길쭉한 테이블과 그 주위를 둘러싼 소파가 있는 아늑한 선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감자칩과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미국, 대만, 스리랑카 등에서 온 여행자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간식을 먹는데 집중했다. 바삭거리는 감자칩소리만이 선실을 채웠다.


감자칩은 놀랍도록 맛있었고 헤이즐넛이 통으로 들어있는 초콜릿도 내 취향이라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노르웨이 음식은 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맛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가공 식품들은 꽤 맛이 좋았다. 냉동 크루아상은 프랑스 빵집 크루아상보다도 쫄깃하고 바삭했다. 비스킷은 너무 맛있어서 미국에 돌아와서도 세 배가 넘는 가격을 주고 아마존에서 시켜 먹었다. 원산지를 보니 핀란드, 덴마크 등 주변 국가가 많았는데 북유럽 시장을 통틀어 살아남은 성공한 제품들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추측이다.


다들 갑판과 선실을 왔다 갔다 하며 핫초코나 차를 끓여마셨는데 나는 핫초코는 저녁 후식으로 마시려고 참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대구를 넣은 생선 수프라고 공표한 선장겸 셰프가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다. 차이브와 샬럿을 잘게 다져 김이 나는 냄비에 쏟아 넣고 빵을 슥슥 썰더니 버터를 작은 접시에 담아서 내왔다. 코딱지만 한 부엌에서도 꽤 능숙한 솜씨였다. 미국에서 온 커플이 유당불내증이라 수프를 못 먹는다고 하자 그는 걱정 붙들어 매라더니 야채수프를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디너 크루즈라는 말에 비해 참으로 소박했지만 수프를 좋아하는 나는 만족스러웠다. 한 그릇을 비우고 또 그릇을 채웠을 때쯤 갑판에 나갔던 선장이 아직 약하지만 오로라가 시작되었다고 알렸다. 나는 수프가 따뜻할 때 다 먹고 나갈 것인가 수프가 식는 한이 있어도 지금 나가서 오로라를 볼 것인가 살짝 고민을 했다. 그래도 생선 수프 먹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 스푼을 내려놓고 갑판으로 나갔다. 방한용 귀마개에, 장갑에, 갑판에서는 꼭 입어야 한다고 선장이 으름장을 놓은 구명조끼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내 생애 첫 오로라를 보는구나, 드디어 버킷리스트에서 한 줄을 지우는구나 벅찬 마음으로 밤하늘을 마주했다. 그러나 밋밋한 하늘을 보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오로라를 마주하게 되면 그 경이로움에 눈물을 줄줄 흘릴 줄 알았다. 우리 일행 모두가 당황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다들 실망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열심히 말을 돌렸다. 기대했던 형광 초록색의 오로라는 휴대폰 스크린 안에만 있었다. 어딘가 속은 기분이었다. 카메라가 감지하는 것을 내 눈이 감지하지 못하다니….


우리 눈에는 빛을 전기신호로 전환하는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빛에 민감한 막대세포는 야간 시야를 좌우한다. 색깔을 인식하는 것은 좀 더 강한 빛에 반응하는 원뿔세포이다. 그러니까 내가 오로라를 카메라만큼 진실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밤에는 일하지 않는 원뿔세포 때문이었다.


물론 잠든 원뿔세포도 깨울 만큼 강력한 오로라를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노르웨이로 여행온 8일 내내 트롬소에서 오로라 투어만 하고 있다는 대만 관광객들은 차를 타고 아주 멀리 가서 새벽 내내 기다리면 맨눈으로도 초록색으로 춤추는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오로라는 아주 폭력적인 현상이다. 태양에서 불어오는 폭풍을 타고 날아온 입자들은 지구의 자기장으로 인해 북극과 남극으로 모인다. 나는 초당 75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오는 태양 입자들과 지구 대기권의 아름다운 충돌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셈이었다.


회색 오로라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의 한심한 능력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명이었다. 우리가 사실은 커다란 자석 위에 살고 있다는 증명. 보이지도 않는 것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증명.


어쩌면 내 눈에 보이지 않을뿐 천사나 조상신도 나를 수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각능력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당연하게 부정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나는 이 지구, 아니 이 우주에서 얼마나 하찮고 소중하고 대수롭지 않은 기적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태양으로 인해 지구 위를 걷고 태양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자기장으로 인해 생명을 부지해 나간다. 참 이상하고도 멋진 우주에 살고 있다.


갑판에 있는 그물 위에 올라가서 누웠다. 맨눈으로도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는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바다와 나 사이에는 그물밖에 없고 우주와 나 사이에는 자기장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장 덕에 우주를 날아온 별빛이 내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켜주고 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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