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비콘으로 떠난 즉흥여행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낮에는 글을 쓰다가 저녁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예상가능했던 평범한 하루는 기차를 타는 순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되었다. 같이 사는 P의 변덕으로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J인 나는 즉흥여행이 싫다. 마음의 준비 없이 급작스레 떠나는 것은 불안하다. 무언가를 빠뜨렸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찜찜하다. 예측가능한 하루와 확실성 안에서 느끼는 평온함이 좋다.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마음의 긴장도 자체가 달라진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져서 두려운 것 같다.
이른 오후인데도 지하철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배낭이나 캐리어를 들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올해 현충일에 여행을 떠난 미국인은 자그마치 4천4백만 명으로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랜드센트럴역에 도착해서 급하게 샌드위치를 사고 Half moon이라고 써진 기차에 올라탔다. 나는 참치 샌드위치, 동행자는 브리치즈와 블랙포레스트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고풍스러운 역사와 다르게 그랜드센트럴역의 플랫폼은 탄광 같은 느낌이었다. 지하철처럼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달리다가 할렘에 와서야 기차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허드슨 강에서 빠져나온 물줄기인 할렘 강이 흐르는 할렘에는 작은 다리들이 많았다. 기차가 북쪽으로 향할수록 도시 풍경이 점차 드문드문해졌다. 기찻길이 강가 바로 옆에 깔려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침수되지 않을까 궁금했다. 드넓은 강의 수면 위로는 윤슬이 아주 거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가져온 책은 펼치지도 않고 한 시간 반동안 넋 놓고 풍경을 감상했다.
비콘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기차역에서 호텔까지는 15분. 기차 안에서 계속 앉아있었기 때문에 우버대신 걷기를 선택했는데 오르막길이었다. 미루나무 꽃가루가 함박눈처럼 내렸다. 더위에 헥헥대면서도 낯선 길을 가는 흥분에 수다를 떨었다. 하얀 강아지가 베란다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털이 빛나서 무진장 귀여웠다.
더위에 조금 지칠 때쯤 마을에 도착했다. 반갑게도 마을 어귀에 카페가 있었다. 더위에 목이 타서 평소에 잘 안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29도까지 온도가 치솟은 여름의 첫날이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마을 구경을 시작했다. 도로도 좁고 건물도 아담해서 작은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마을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피쉬킬 산에 밝혔던 봉화에서 이름을 따와 비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메인 스트리트를 걸으면 피쉬킬 산맥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작은 상점들은 하나하나 독특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쇼핑을 싫어하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했다.
한 골동품점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레코드 플레이어에서 Earth, Wind & Fire의 After the Love Has Gone이 흘러나왔다. 동행자인 남편은 하퍼스 바자 1885년호를 모아놓은 책을 발견했다. 종이가 부스스 떨어지고 금방이라도 바사삭 삭아 가루로 날아갈 것 같은 책이었다. 원래 책만 50달러라고 했는데 흥정해서 40달러에 살바도르 달리 책까지 얻었다.
내가 비콘에서 유일하게 보고 싶은 것은 폭포였다. 상점들을 구경하다 보니 조금 늦은 시간에 폭포에 도착했는데 구글맵에서 본 폭포 명당에 이미 누가 앉아서 맥주를 까고 있었다.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그 남자의 머리통이 사진에서 보였다.
나는 폭포 옆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여행을 하며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은 자연 속에서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어딘가에 도착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사람이었다. 폭포를 감상하고 싶은 내 옆에서 벌레가 많다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결국 폭포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칵테일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조용한 곳에서 자연의 정취를 감상하고 싶지 시끄러운 레스토랑에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여행을 할 수 없는 나는 심통이 났다. 혼자 자유로이 여행하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언제까지고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를 만끽하려면 외로움을 버텨야 하고 유대감에는 어떤 구속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짜증스러웠던 마음은 시원한 상그리아를 마시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매니저에게 부탁해서 폭포가 정면에 보이는 명당자리에 앉게 되었다. 남편에게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전채요리로 매사추세츠 산 웰플릿이라는 이름의 굴을 시켰다. 강렬하게 짭짤한 맛이랑 깔끔한 뒷맛으로 뉴잉글랜드 굴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굴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는데 하나같이 통통했고 신선해서 레몬즙만 뿌려서 먹었다. 바닷물의 염도, 거센 조류, 굴의 먹이인 플랑크톤이 굴맛의 비결이라고 했다. 구운 복숭아와 아몬드가 올라간 아르굴라 샐러드도 맛있게 먹었다.
메인 요리는 파로 아일랜드산 연어를 시켰는데 이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깍지완두와 쿠스쿠스가 곁들여 나왔고 꿀과 레몬으로 간을 했는데 재료들의 식감과 맛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마을 구경을 이어나갔다. 작은 마을 위로 푸른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오래된 다이너의 빨간 네온사인이 켜지고 펍에서는 흥겨운 공연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간을 산책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은 2차 세계대전 때 항공 점퍼를 만들던 바느질 공장을 개조한 것이라고 했다. 공장의 사소한 디테일이 남아있어서 신기했다.
호텔 침대는 구름처럼 포근했다. 여행하며 본 것들에 대해 수다를 떨다가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소파에 누워서 시트콤을 보다가 잠이 드는 평소의 일상에선 이런 꽉 찬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여행은 불확실과 친해지는 과정이다. 확실하게 편안한 일상을 자꾸만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지의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시간들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