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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May 16. 2024

지구 최북단의 맥도날드와 고래 스튜

노르웨이 레코드

트롬소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트롬소 근처에 스키 리조트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우리 일행은 지난밤 늦게까지 스키를 타러 갈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했다. 말이 토론이지 나 혼자 떠드는 동안 일행은 제각각 스크롤을 내리며 쇼츠에 빠져있었다. 나는 결국 너희들과는 되는 일이 없다며 포기를 선언하고 자러 갔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계획된 일정이 없는데 어쩌지라는 걱정부터 들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J라는 것을 또다시 실감하고 말았다.


우리는 결국 스키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대신 트롬소를 더 구경하기로 했다. 느긋하게 호텔 부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다양하게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는 치즈와 요거트, 삶은 달걀, 베이컨, 구운 감자, 영국식 삶은 콩까지 기본적인 아침 식사 메뉴는 다 있었고 빵 코너에는 페이스트리와 디저트도 풍성했다. 에스프레소 바에는 모카든 카푸치노든 뚝딱 만드는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과식을 하고 말았다. 사실 스칸디나비아 항공 라운지에서부터 음식에 대해 걱정하던 차였다. 노르웨이인들이 생각보다 소식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침시간이라고 해도 유료 라운지에 오트밀과 요거트, 빵과 버터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경악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익숙하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작은 요거트 그릇을 들고 깨작거렸다. 도대체 뭘 먹고 키가 큰 거지?


정오에 가까운 시간에 부른 배를 두드리며 관광에 나섰다. 4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벤치와 동상이 반은 눈에 파묻혀 있었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얼음판에서 미끄러진 남편을 보며 웃던 나는 정확히 10초 후 똑같은 모습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통은 잠시 뉴욕에서 봄을 맞이하다가 와서 설경을 보니 꼭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색이 우습게 기분에 취해 빨간 스웨터를 하나 샀다. 노르웨이 국기와 함께 북극 탐험자라고 자수가 놓아져 있어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작은 도시인만큼 트롬소 구경은 금방 끝났는데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부활절 기간이라 식당이고 상점이고 문 연 곳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그나마 문을 연 카페나 식당은 관광객들과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한참을 헤매다 한 프랜차이즈 피자 가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날 지나가다가 여기까지 와서 피자를 먹는 관광객들을 보고 비웃었던 곳이었다. 냉동피자 맛이 나는 피자를 씹으며 여기까지 와서 피자를 먹어야 했던 그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고 깊이 반성했다.


점심은 그렇게 실망스럽게라도 때웠으나 저녁이 문제였다. 밤이 되자 정말 문 연 곳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호텔 직원은 자기 나름대로 조사를 해서 오픈한 레스토랑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구글맵을 뒤지고 전화를 돌리느라 한 시간을 쓴 우리 눈에 그 리스트는 흡사 보물지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리스트에 있는 레스토랑들도 이미 예약이 꽉 차있다고 했다. 친절한 직원이 혹시 모른다며 우리를 위해 다시 전화를 돌려줬지만 연락이 닿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무작정 영업한다는 레스토랑에 가보기로 했다. 혹시 예약이 취소돼서 테이블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입김이 호호 나오는 추위에 꽝꽝 얼은 눈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텅 빈 도시를 저벅저벅 걷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펍에서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소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 작은 펍에 모여있는 것처럼 붐볐다. 고요하고 싸늘한 거리에서 실내의 열기로 김이 서린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트롬소의 모든 에너지와 소리, 흥이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소리와 열기로 꽉 차서 뜨거운 실내와 텅 비고 싸늘한 거리 사이 간극이 이질스러웠다. 그런 낯섦이 여행의 맛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더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굶주린 나의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십 분을 걸어 한 해산물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트롬소 주민이 추천한 곳이어서 반가웠다. 생각보다 빈 테이블이 많아 반색한 우리에게 호스트는 안타깝게도 모든 음식이 동이 났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남은 음식은 고래 스튜인데 그거라도 괜찮으면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아! 합법적으로 잡힌 고기야! 라며 웃었다.


우리가 주저하는 이유가 법을 어기는 걸까 봐라고 생각하다니 어찌 보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그녀를 보며 어색하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 세 남자는 굶을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자리에 앉아서 고래 스튜를 기다리는데 영 기분이 찜찜했다. 멸종 위기 동물인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게 영특한 동물을 먹는다면 왠지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길 것 같았다.


인간의 잣대로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으면 안 되는 동물을 나누는 것은 오만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치킨과 보신탕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볼 수도 없기에 머리가 아파 피해오던 주제였다. 이렇게 굶주린 상태에서 이렇게 어려운 주제에 대해 내 소신을 정해야 하다니. 너무 가혹했다.


내가 만약 외딴섬이나 개발되지 않은 해안지역에 사는 바다 유목민으로 태어났다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고래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동물에게 그렇듯이 생존이 그 어떤 철학적인 가치에 우선하니까. 실제로 이누이트족들은 고래에 의지해 생존했다. 고래를 사냥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끼니를 때울수도, 불을 밝힐수도 없었으며 이동수단인 허스키들을 먹일수도 없었다. 하지만 난 이누이트족이 아니었다. 멍하니 앉아서 맥주를 들이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구글에 고래를 먹으면 영적으로 죄를 짓는 건가요 따위를 검색해 봤다. 고래 고기의 소비를 반대하는 서양인들과 철학적, 종교적인 논쟁을 하는 일본인의 블로그 글이 떠서 읽다 보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이미 희생된 동물이라면 그 고기를 낭비하는 것이 더 큰 죄악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버려질 고기라면 노르웨이에 온 김에 한번 먹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크게 마음을 먹은 순간 앞에 음식이 놓였다.


커다란 접시를 가득 채운 건 선홍빛의 스테이크였다. 스튜를 기다리던 일행은 당황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지라며 결심한 듯 포크를 쥐었다. 나는 그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고 식욕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고래라 살면서 수도 없이 고래가 그려진 소품들을 사 왔다. 내가 이걸 먹는다면 동생은 실망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경험으로 치고 한 입 먹어보는 건 나쁘지 않지라고 마음을 먹어도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래의 노랫소리가 귀에서 들리는 거 같았고 아바타의 툴쿤도 생각이 났다.


혼자 생각에 사로잡혀있는데 옆에서 고래고기를 맛본 일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다들 아예 포크를 내려놓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이 아닌가. 고래 고기를 먹는 데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대문자 T 남편조차 두입을 겨우 먹었다. 일행은 고래 고기의 맛이 고기와 생선의 비린 맛을 섞어놓은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에 살면서 임팔라 고기고 악어 고기고 안 먹어본 고기가 없는데 이렇게 이상한 맛은 처음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우리는 결국 직원에게 스튜를 시켰는데 스테이크가 나왔다고 그냥 먹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다. 직원이 미안하다며 50% 할인을 해줘서 결국 고래 스테이크의 반값만 지불하고 식당을 나왔다.


텅 빈 위장과 대미지를 입은 정신을 붙들고 밤거리를 걷던 우리는 맥도날드 로고에서 광명의 빛줄기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지구 최북단에 위치한 맥도날드라는 광고판이 서있었다. 전날 낮에 걷다가 그 광고판을 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지구 최북단의 맥도날드에 가게 될 것임을.


지구 최북단에 있는 노르웨이 맥도날드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멕시칸 음식이 흔한 미국에도 없는 치킨 살사라는 메뉴가 있었다. 나초가 들어간 치킨 버거였다. 그리고 감자튀김과 더불어 고구마튀김을 팔고 있었다.

트롬소의 비행 청소년들이 노르웨이어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이에서 허겁지겁 치킨 버거를 먹었다. 닭에게는 미안하지만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고구마튀김도 너무나 맛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배는 두둑하고 마음은 가벼웠다. 나는야 지능과 맛에 따라 동물을 편애하는 오만하고 배부른 인간. 인정하고 나니 헝그러워졌다. 고래고기가 맛이 없다는 게 참 다행이다. 고래 고기가 맛있었다면 내 인생은 쓸데없이 조금 더 복잡해졌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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