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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Jul 13. 2024

여름의 첫날에는 기차여행을

뉴욕 비콘으로 떠난 즉흥여행

검고 두꺼운 벨벳 커튼 사이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검은 페인트로 칠해진 철제 골조가 지나가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집이 아니라 공장을 개조한 호텔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한 부분이다. 낯선 방에서 눈을 뜨고 본능적으로 엄습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안도감으로 바뀌는 기묘한 아침은 오직 여행할 때만 맛볼 수 있다. 


잠은 깼지만 호텔 침대가 너무 포근하고 안락해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바다 건너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여행 사진을 보내고 수다를 떨었다.


조촐한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했다. 호텔에 짐을 맡겨놓고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사진 스튜디오로 향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구식 사진기가 시선을 끌어서 궁금했던 곳이었다. 알고 보니 필름 사진보다 오래된 틴타입 방식으로 촬영을 하는 스튜디오였다. 틴타입은 얇은 주석판이나 금속판에 사진을 찍는 빈티지 사진 기법이다.



이미 호기심이 폭발한 남편은 바로 촬영을 예약하려고 했지만 나는 망설여졌다. 급하게 떠나온 1박 여행이라 화장품도 가져오지 않은 상황인데 200년 넘게 보존된다는 금속판에 맨얼굴을 박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격도 보통 사진 촬영보다 비쌌다. 사진사와 남편이 눈빛으로 압박하는 와중에도 고민을 하다가 여행할 때 돈을 쓰지 언제 쓰겠나 싶고 틴타입 스튜디오를 언제 또 발견할까 싶기도 해서 결국 예약을 잡았다.


진짜 이유는 고전영화에서 본 장면들이었다. 사진사가 사진기에 달린 검은 천에 머리를 들이밀고 줄 끝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번쩍하고 섬광이 터지면서 사진이 찍히는 그런 장면들.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혀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 같았다. 맨얼굴로 사진 촬영을 하면서 외모에 초탈해지고 용감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5분 일찍 도착했더니 사진사가 트럭에서 반려견을 내려주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의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앉지는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스튜디오를 구경했다.


과연 스튜디오는 보통의 사진 스튜디오와 달랐다. 사진에서만 보던 커다란 사진기와 사진 스튜디오 보다는 실험실에서 볼법한 화학약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은빛 광택이 나는 금속판에 찍힌 인물들은 현대의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백발에 커다란 고래문신이 있는 사진사 오렌은 좁은 스튜디오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한참을 화약용품들을 만지작대더니 아주 커다란 반사판을 힘겹게 설치했다. 스튜디오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반사판 앞에 선 우리의 포즈를 잡아주더니 사진기 뒤로 모습을 감췄다. 상상처럼 줄 끝에 달린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섬광은 상상한 대로 번갯불 같았다.


오렌은 스튜디오 구석에 암막이 쳐진 곳에 들어가 작업을 하더니 작은 판을 들고 나와 보여줬다. 얇은 금속판에는 우리의 모습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그 판을 어떤 액체 속에 넣었더니 순식간에 사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갑자기 마법처럼 형상이 드러나는 게 정말 신기했다.



사진 작업이 끝나고 오렌에게 고래 문신에 대해 물었다. 어릴 때부터 고래를 좋아했던 그는 어른이 되면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고래를 보러 가야지라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비콘이 너무 비싸서 멕시코나 이탈리아로 이사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도 했다. 소득에 기대지 않아도 생활이 되고 가끔 용돈벌이로 사진촬영을 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다. 비콘 집 가격이 그렇게 비싼가 했는데 알고 보니 살지도 않는 맨해튼 아파트에 월세도 내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일주일 뒤에 사진을 택배로 받았다. 나는 멀쩡하게 나왔는데 남편은 인종이 다르게 보일 정도로 피부색이 어둡게 나왔다. 생각해보니 오렌의 반려견인 스텔라는 갈색 털을 가졌는데 틴타입 사진 속에서는 까만 개처럼 보였다.



사진촬영이 끝나고 오렌이 추천해 준 식당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갔다. 뒷마당에는 있는 테이블에 앉았더니 장미 덩굴에, 파란 하늘에,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초여름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계란프라이에 해시브라운, 매운 마요네즈 소스가 들어간 행오버 에그 샌드위치를 시켰다. 맛은 좋았지만 한국인이 첫 끼로 먹기엔 매우 느끼했다. 느끼한 걸로 해장하는 미국인들 입맛에는 딱일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산책하다 들린 카페에서 아이스 모카를 주문했다. 그런데 오트 밀크가 들어간 모카가 나왔다. 나는 좋아하지만 남편이 못 마시겠다고 바꾸러 갔더니 보통 우유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보통 우유를 취급조차 하지 않는 카페라니. 너무 비콘다워서 웃겼다.



아이스 모카를 마시며 또 폭포를 보러 갔다. 살짝 비린 물냄새가 났지만 폭포에서 불어오는 삽상한 바람이 좋았다. 더운 여름날에 폭포를 바라보는 것처럼 상쾌한 일이 있을까? 그늘에 앉아서 왜 폭포가 좋은지 생각해 봤다. 하얀 물줄기와 후련한 소리가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켜 주기도 하지만 폭포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수백억 개의 물방울이 쏟아져 내려와 수면과 만나고 퍼지면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 우리는 그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에 끌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다. 하루종일 폭포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저녁에 집에 도착하려면 오후 4시 기차는 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콘에 하루 더 머물고 싶어도 남는 호텔 방이 없었다. 집이 그립기도 하고 비콘을 떠나기 싫기도 한 요상한 마음이 들었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메인 스트리트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거부할 수 없는 무더운 날씨였다. 마을 초입에 와서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세월이 가늠되는 오래된 로컬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나는 배랑 망고 소르베를 시켰고 남편은 초콜렛과 라즈베리 맛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마을 어귀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서 소르베를 먹었다. 무더위에 달아오른 몸의 체온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즉흥 여행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남편은 자꾸 내 소르베를 뺏어 먹었다. 배 소르베가 너무 맛있어서 배는 무조건 이렇게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탱크보이 없이 자란 그의 유년시절을 동정했다.



식힌 땀이 무색하게 또 땀을 흘리며 걸어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뻥 뚫린 플랫폼에서 허드슨 강바람을 쐬니까 좀 살 것 같았다. 선선한 가을이 오면 다시 비콘에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4시에 도착한 기차를 타고 다시 뉴욕으로 향했다.



그랜드센트럴역에 도착하고도 또 만원전철에 낑겨서 집까지 가는 여정은 좀 힘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편안하고 안락한 집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늘 거기 있는 것들에 새삼스레 감사하게 되는 것. 여행이, 떠남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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