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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Aug 07. 2024

불완전하고 자주적인 행복

자메이카로 떠난 여름휴가

새벽 5시에 오렌지빛 일출을 보며 일어났다. 여행을 취소하고 더 자고만 싶은 마음은 뜨거운 샤워를 하면서 씻겨 내려갔다. 샤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인 것 같다.



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몬티고 베이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레게음악이 들려왔다. 공항 문 바로 옆에 위치한 마가리타빌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전조끼를 입은 공항 직원들도 일제히 몸을 흔들고 있어서 감탄했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의 모자가 날아가서 잡아주려는 몸짓이었다.


섬의 풍경은 원색물감으로만 칠해진 그림엽서를 보는 것 같았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날씨는 더웠다. 기온은 31도였지만 바람이 계속 불어서 견딜만한 더위였다. 호텔로 가는 동안 쉘든이라는 이름의 드라이버는 자메이카에 대해 속성 강의를 해주었다.


자메이카는 비교적 최근인 1962년까지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자메이카인들은 8월 1일부터 6일까지 성대하게 축제를 하며 독립을 기념한다. 영국의 영향으로 아직도 행정 지역을 Parish(교구)로 나누는데 우리가 머물 지역은 트릴로니 교구였다. 제국주의의 흔적을 보고 해리포터를 떠올리는 것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메이카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노족은 스페인이 처음 섬을 점령했을 때 학살당하거나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배에 실려온 전염병에 목숨을 잃었다.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할 만큼 자주적이었던 타이노족은 말살되었고 해먹, 바베큐, 허리케인, 카누 등 그들의 아름다운 언어만이 남아있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아름다운 터키석 색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짓다 만 리조트건물들과 초가삼간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사인 볼트가 나온 고등학교도 볼 수 있었다.


쉘든은 자메이카의 모국어인 파투아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파투아는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한 데서 유래했다. 파투아라는 언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와구완, 야만, 아이뤼 등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이었다. 자메이카 문화의 침투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눈길을 끈 것은 무성하게 자라난 아몬드 나무들이었다. 파란 바다와 초록색 숲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마음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첫인상과 달리 자메이카에 대한 호감정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자메이카인들 때문이었다. 보통 카리브해 휴양지에서 만나는 현지 직원들은 팁을 얻기 위해서라도 의례적인 친절과 미소가 기본이었는데 자메이카인들은 굉장히 불친절하고 뾰로통했다. 어찌나 퉁명스러운지 물 한 잔 달라고 부탁하기도 부담스러운 지경이었다.


게다가 정오쯤 호텔에 도착했는데 여러 문제가 생겨서 밤 9시가 넘어서야 머물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날부터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서 일부러 아침 비행을 선택했는데 바다에는 발도 담그지 못했다. 휴가 첫날을 아예 망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다른 나라에 갈걸 왜 자메이카를 선택했을까 후회도 들었다. 여름휴가에서까지 날이 서서 타인의 기분을 걱정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남편도 나도 지쳐서 말이 없었다. 휴가라서가 아니라 속이 상해서 레드와인을 시켰다. 저크 포크도 저크 치킨이 들어간 엠파나다도 맛있었지만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 왜 여름휴가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나는 아직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에 정처 없이 흔들릴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보는 글귀들을 읽어봤다. 그날따라 한 글귀가 유난히 와닿았고 하루종일 저기압이었던 기분은 전환점을 맞았다.


그 누구도 책, 시, 노래, 커피 한 잔에 의해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를 꺾을 수 없다. 삶조차 그녀에게 굴복한다.


레바논 출신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한 말이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런 대접을 할 수가 있어? 나 너무 화가 나. 네가 내 오늘을 망쳤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에 의해 기분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불친절하고 불성실했던 직원들도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서로가 친절하게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면 좋겠지만 나조차 기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형편없는 알바생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원망이 사라졌고 후련해졌다.


남들이 나에게 잘해줘야만,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느껴지는 행복에는 힘이 없다. 가장 쉽고 값싼 행복이기도 하다.



마음을 고쳐먹고 나서는 자메이카인들의 태도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또 다른 투숙객들과 얘기를 할수록 그게 단순히 자메이카인들의 경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했다. 자메이카의 밤은 귀뚜라미와 개구리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흡사 외계인 같은 소리가 났다. 복도 천장에는 나방을 잡아먹으려는 작은 도마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자메이카의 자연은 사람과 달리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맹그로브와 방갈로 사이를 날아다니며 짹짹대는 노랑 솔새. 아침마다 휘어진 소나무 가지 위에 와호장룡처럼 앉아 수평선을 주시하는 갈색 사다새.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꽃 사이를 날아다니던 벌새.



늘 한 줄로 떠 있는 민트색 오징어 가족. 우아하게 헤엄치는 산호초만 한 가오리. 까만 밤하늘에 뜬 파란 별 같은 노랑꼬리 자리돔. 내 눈치를 보며 숨바꼭질을 하던 가시복. 바다보다 더 푸른색을 가진 블루헤드 놀래기. 나를 둘러싸고 빙빙 돌던 파란 줄무늬의 전갱이 무리.


내 기분의 자주권을 되찾자 강인해진 기분이 들었다. 바다 냄새가 섞인 밤공기를 만끽했다. 까만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과 파도소리, 영원히 지속되는 여름밤. 무한대로 자유로워지는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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