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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08. 2024

당신이 사랑을 말하는 언어


아기처럼 보행기 없이는 잘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내가 온다고 또 무말랭이를 만들어서 싸놓으셨다. 나는 군말 없이 이를 받아 든다. 무말랭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무말랭이를 좋아한다는 할머니의 오해는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밥상에서 ‘무말랭이도 먹어.’ 라고 하셔서 몇 번 집어먹었고 철이 들고나서는 무말랭이에 드는 할머니의 노고 때문에 먹었다. 큰 칼로 무를 얇게 썰고, 햇볕에 무 조각 하나하나를 펼쳐서 말리고, 양념을 만들어 무치는 그 고된 과정이 떠올라서 싫어도 먹었다. 햇빛에 쪼그라든 질긴 무의 식감이 싫었지만 먹었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무말랭이를 커다란 김치통을 꽉 채울 만큼 만들어서 준비해 놓으셨다. 할머니댁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고운 보자기에 묶여있는 무말랭이가 보였다. 그렇게 받아온 무말랭이는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버려졌고 버려지는 무말랭이 조각 하나하나를 보며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할머니에게 힘드시니까 하지 마시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기어코 할머니가 싸준 무말랭이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할머니의 상처받은 표정에 시달렸다. 나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김치통을 꽉꽉 채운 무말랭이는 무거웠고 무려 3시간 동안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가는 여정에 쉬어버릴 염려도 있었다. 무말랭이 운반에 성공한다 해도 어차피 미국에 들고 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할머니는 무말랭이를 가져갈 것을 종용했고, 나도 더 이상 무말랭이를 버리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버텼다. 입씨름을 하다가 현관에 무말랭이를 두고 나서며 마지막으로 본 할머니의 표정은 마치 사랑을 거부당한 사람의 얼굴과 같았다.


미국에 돌아와서 할머니의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무말랭이란 도대체 뭘까?


할머니는 다정한 말로 칭찬과 사랑의 표현을 하실 줄 모르셨다. 평생 그런 언어를 들어본 적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은 더 이상 할머니가 팔베개를 해주지 못하고 목욕탕에 데려가서 때를 밀어주지 못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그 사랑이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언어로 열심히 사랑을 표현하고 계셨다. 나에 대한 걱정을 하고 내 입에 들어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그분이 유일하게 아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입으로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된 무말랭이 조각 하나하나가 할머니의 사랑이었다는 걸. 무말랭이란 당신이 사랑을 말하는 언어였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다른 언어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지고 사랑은 샘물처럼 솟아났다. 나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기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치리베디히, 워아니니처럼 표현만 다를 뿐이라는 것. 무말랭이가 준 깨달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소통하지 못한다. 서로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이걸 알게 되고 나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는 시도는 그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언어는 사람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생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적당한 스킨십인 것 같다.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내가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은 꼭 다 먹이려고 노력한다. 나도 동생이 나를 보러 미국에 왔을 때 음식에 신경을 썼다. 간지럽지만 매일밤 잠자리에 드는 동생의 이마에 뽀뽀도 해줬다.


전 세계 수많은 커플을 구해낸 책 5가지 사랑의 언어에 따르면 남편의 사랑의 언어는 서비스와 스킨십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남편이 왜 발톱을 잘라달라고 하는지. 요새 젊은이들은 기혼감성이라고 치를 떨 일이고 비혼주의자시절의 나였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기꺼이 해주고 싶어졌다.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사랑을 느끼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주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나와 정확하게 같은 언어를 쓰는 단짝친구 하나뿐인 것 같다. 나에게 사랑해라는 언어는 사소한 일과 하나하나를 궁금해하며 물어봐주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나의 생각과 감정에도 관심을 기울여 들어주는 일이다. 친구와 나는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했고 금세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은 아무래도 원어민이 아니고 학습으로 배운 언어라서 인지 그 진정성이 덜하다. 내가 그 언어로 사랑을 이해하니까 노력해서 해주는 느낌이다. 내가 질색하며 그의 발톱을 잘라줄 때 남편도 그렇게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의 언어를 쓰려는 그 노력 자체가 사랑인 것 같다.


이제는 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언어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 사랑이 이제는 들린다.


*


이 글을 써놓고 며칠 있다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무말랭이를 언젠간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저릿해진다. 어떤 언어는 사람과 함께 죽는다. 시간이 다 가기 전에 할머니의 언어를 배워야겠다. 그리고 할머니의 언어로 말해야겠다.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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