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마들렌의 프루스트 현상
프랑스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졸업과 취업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리자 프랑스에서 자유로웠던 생활이 더더욱 그리웠다. 매일밤 눈을 감은채 자전거를 타고 누비던 동네 골목 하나하나를 떠올리고 트램을 타고 지나갔던 역들의 이름과 풍경을 되새겼다. 잊고 싶지 않아서, 기억을 잡아두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에서 썼던 바디로션을 몸에 펴 바르는데 갑자기 기억이 홍수처럼 몰려오는 경험을 했다. 단순한 시각적 기억뿐만 아니라 그 로션을 바르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던 길, 밤의 공원을 가로지르던 느낌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같은 향의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며 외출준비를 하던 순간들과 그때의 설렘과 기대까지도. 그 로션은 다시 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향만 맡아도 몰려오는 기억들을 음미하며 행복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 향을 맡으면 맡을수록 향과 함께 기억도 증발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처음처럼 기억이 와르르 쏟아지는 강렬한 경험은 할 수 없었다. 향에 각인된 기억들이 현재의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씌워질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 향은 기억이 퇴색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아껴두어야 했다.
영국에 살 때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향의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바디워시도 바디로션도 브리티쉬 로즈 향을 썼는데 영국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그 향을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다. 좋아하는 향이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용도로 쓰려면 어쩔 수 없었다. 향에 실린 기억이 희미해지는 게 싫어서 외면하는 향기들이 늘어갔다.
냄새와 기억은 우리 뇌의 구조상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코를 통해 들어온 냄새는 전두엽 아래에 있는 후각망울이 받아 변연계로 보낸다. 변연계는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조절하기 때문에 혹자는 냄새와 감정이 하나의 기억으로 저장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격렬한 감정을 겪고 있는 순간에 어떤 냄새를 맡게 되면 변연계에 위치한 해마는 이 냄새를 중요한 기억으로 분류해서 영원히 저장한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도 그 기억과 뒤얽힌 향으로 인해 또렷하게 재경험이 가능한 이유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에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와 마들렌의 향을 통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향과 맛이라는 감각을 통해 어떤 감정이 먼저 떠오르고 그 감정을 느끼게 했던 기억도 재인된다. 그래서 감정적이고 자전적인 기억을 선명하게 되새기게 하는 냄새의 능력에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유명한 미드 브레이킹 배드에도 이 현상이 나온다. 주인공 월터와 거스가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거스가 말한다. “참 신기하지, 이 스튜는 단순히 재료들의 조합일 뿐이고 따로따로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데 이를 합쳐놓은 스튜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게.” 고등학교 화학교사인 월터는 거스에게 대답한다. “감각은 뉴런이 신호를 보내게 하고 이 신호로 인해 우리는 기억이 저장된 공간으로 되돌아가죠.” 거스처럼 타향살이를 하는 나도 집안에서 나는 미역국이나 흰 죽 냄새만으로도 정서가 안정되고 향수병이 달래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향과 기억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서는 여행을 향과 엮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지에 가서 새로운 향수를 사서 여행 내내 그 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 대뇌에서는 여행의 기억과 향 사이에 신경 연결망이 생길 거고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뉴런은 주문을 들은 것처럼 기억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할 테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어떤 향을 기억과 연결시키면 아무리 좋아하는 향이라도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억과 함께 향을 묻어두어야만 필요할 때 그 향을 맡아도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니까. 또 다른 문제는 내가 여행 갈 때마다 새로 향수를 사서 다시는 안 쓰고 간직할 만큼 부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는 언젠가 좋아하는 향도 다 바닥이 나서 더 이상 매칭할 향이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이런 고민을 할 무렵 영국과 프랑스에서 썼던 제품들을 생산하는 회사가 북미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억은커녕 향조차 영원히 봉인할 수 없다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철저히 이익에 의해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품에 큰 가치와 애착을 둔 것부터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제품이 단종되는 불편이 처음은 아니었다. 데이트를 할 당시 남편은 휴고 보스의 소울이라는 향수만 뿌리고 다녔는데 어느새 나도 그 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몇 년 뒤 그 향수는 단종되었고 우리는 향수 가게만 눈에 보이면 들어가서 추노를 하게 되었다. 최근 모조품인지 재고품인지 몰라도 어렵게 그 향수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 향수를 뿌린 남편의 체취를 맡은 순간 돌연 데이트 시절 설렜던 기억들이 압축파일을 연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로 보였다. 아쉽게도 이 향수마저 다 쓰고 나면 남자친구는 정말 기억 속에만 남겨둬야 한다.
자연에서 나는 향에만 기억을 결합시켜야 할까? 하루에도 수십 종의 동식물이 멸종되는 시대에 그게 가능할까? 어쩌면 기억을 특정한 향속에 가두어두고 생생하게 음미하려는 것도 나의 욕심일 수 있다. 움켜쥐고 내려놓지 못하는 강박일지도 모른다. 기억들만은 나와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것도 착각일 테니까.
기억의 나무는 시나브로 잎사귀를 하나둘 떨어트리고 앙상해져만 간다. 이미 떨어져 버린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처럼 매만져보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빛을 잃고 손 안에서 바사삭 부서져버린다.
희미하게 멀어지는 기억은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이 변하고 소멸되는데 기억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낡고 바랜 그림 위에 덧칠을 하듯이 억지로 되살리는 기억에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진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뇌가 하드 드라이브라도 되는 양 기억의 파일들을 관리하려고 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무리 용을 써도 어떤 기억은 날아가게 마련이고 어떤 기억은 뿌리가 깊고 단단해서 뽑아내려 해도 뽑아지지 않는다. 수십 년을 잊고 지냈던 기억이 불현듯 표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손아귀에 힘을 푼다. 쥐고 있던 기억은 낙엽처럼 날아가고 흐려진다. 담담하게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오늘의 순간들을 바라본다. 기억의 나무에 파란 새순들이 돋아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