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주의자의 여행
뙤약볕이 짙은 그림자를 그려내는 계절,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한국에 오게 되었다.
정신없이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갔다가 의정부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해야 할 일들을 마친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서점에 들렀다가 길을 걷는데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새하얗고 사방에서 매미소리가 징징 울렸다. 문득 깨달았다. 한국에서 여름을 맞는 것이 10년 만이란 걸.
여름에 태어난 나는 늘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뽑았다. 여름에는 겨울날에 느껴지는 쓸쓸함이 없어서 좋았다. 모든 것이 푸르고 생동감 있게 살아있고 열렬했다.
선선한 여름밤에 자전거를 타는 일,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취해가는 기분, 맑고 파란 여름날 하늘, 화사하고 가벼운 사람들의 옷차림, 장마철 버스 창을 때리는 세찬 빗줄기와 빗물에 불은 발가락의 느낌까지 다 좋았다.
가장 그리웠던 여름날의 묘미는 계곡이나 바다로 떠나는 피서였다. 단짝친구와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고려해 남한산성에 있는 계곡에 가기로 했다.
내가 기상하기도 전에 집을 떠난 친구는 여러 휴게소를 들려 오징어를 먹고 호두과자를 먹고 열심히 달려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 나는 친구와 읽을 책을 여러 권 가방에 싸서 달려 나간다. 돈까스도 냉면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옛날 서울 느낌이 나는 동네에서 돈까스 냉면을 먹는다. 배가 별로 안 고프다던 친구는 왕만두도 꿀떡꿀떡 잘 먹는다.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아샷추와 메론킥을 사서 남한산성을 향해 달린다. 여행 가는 분위기에 들떠 신화의 으쌰! 으쌰!를 따라 부르는 동안 산의 이름이 여러 번 바뀐다.
차갑고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싶다는 우리의 소원은 출입금지 팻말에 가로막히고 만다. 눈앞이 아득해진 우리에게 쿨조끼를 입은 아저씨의 모습을 한 천사가 다가와서 저 베이커리 옆으로 내려가면 들어갈 수 있는 얕은 계곡이 있다고 말해준다.
물 반 사람 반인 계곡물은 미숫가루색이지만 우리는 기어코 우리만의 조용한 공간을 찾아낸다. 어린이들이 쏘는 물총도 닿지 않고 시끌벅적한 평상에서도 멀리 떨어졌지만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이다.
친구는 최근에 읽고 좋았던 책을 나에게 선물해 주고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상뻬의 책을 읽어만 보라고 준다. 주변 환경을 잊고 책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좋아하지만 오늘만큼은 그게 싫어서 책을 덮었다. 지금 순간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선명하게 새겨놓고 싶어서.
새파란 여름 하늘에 새하얀 뭉게구름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노적산의 푸른 나무들은 산들바람에 흔들거리고
폭우로 불어난 계곡물은 쏴아아 쏟아지고
물결은 우리 발밑으로 굽이치고
친구는 옆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있고
이제는 사라졌다던 잠자리들이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우리들의 여름날 오후
밤공기를 맡으며 함께 자전거를 타던, 수통골 물줄기 속에서 수박과 함께 데굴데굴 구르던, 더 이상 달리지 않는 기차 안에서 잠을 청하던, 우리의 지나간 여름날들이 떠오른다.
18세에 만난 우리는 함께 있으면 18세로 돌아간다.
15세에도 서로를 알았지만 이름 이상의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은 18세이다.
15세의 나는 복도를 뛰어다니는 친구를 몰래 관찰했고
15세의 친구는 우리 반 뒷문에 와서 나를 몰래 관찰했다.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될 운명이었다.
우리가 만나면 둘이 아니라 셋이 된다. 우리를 지켜주러 천사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천사는 제주도의 엔젤 렌트카로, 청계산 호텔에 걸린 You’re my angel! 이라는 그림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가 완벽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힘을 쓴다.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붙어있으면서도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던 우리는 이십 년이 흐른 지금 태평양에 가로막혀 자주 보지 못한다. 견우와 직녀처럼 1년에 한 번 만난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내지 두 번은 꼭 만나고 그렇게 함께 한 시간이 또 1년을 살게 한다.
가져온 책도 읽었고 커피도 다 마신 우리는 5분마다 한 번씩 떠내려오는 크록스를 구경한다. 하류에서 뿌듯한 표정으로 크록스를 건진 어느 아빠가 상류에서 민망한 표정으로 첨벙 대며 달려오는 어느 아빠를 기다리는 장면도 웃으며 바라본다.
평상에 앉아 낮술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시시각각으로 불콰해지는 얼굴도 구경하고 난생처음으로 계곡에 온 신생아의 반응도 구경한다. 검은물잠자리가 우리 곁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한다.
깨알만 한 연두색 거미는 내 모자 위에 영차영차 집을 짓고 있다. 친구는 흥미로운 눈으로 건설현장을 지켜보다가 나중에 거미가 실망할까 봐 초록색 나뭇잎으로 옮겨준다. 거미는 생각보다 쿨하게 짓던 집을 두고 떠난다.
7월의 뭉게구름에 감탄을 하며 청계산 근처 호텔에 도착한다. 호텔에 사는 고양이와 인사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 청계산 밑자락에 있는 한식당에서 등산객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함께 있으니 시원하지도 않은 맥주가 달고 맛있다. 해물파전이랑 더덕구이랑 고추창 삼겹살 구이를 시킨다. 평소만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친구는 왕만두 때문에 배가 불러서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한식을 가장 좋아하지만 자주 먹지 못하는 내 취향을 배려해 메뉴를 시키기 때문이라는 걸.
맥주를 거듭 들이켜고 잔을 부딪힐 때마다 서로의 건강을 기원한다. 페이스타임으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자꾸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수변공원 산책을 한다. 우는 것은 맹꽁이일까 개구리일까 궁금해한다. 산책로로 나온 지렁이가 밟혀 죽을까 봐 흙으로 옮겨준다.
호텔로 돌아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각자의 침대에 누워서 티비를 본다. 같이 보면 뭘 봐도 재밌어서 새벽 두 시까지 티비를 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고운 표정으로 자고 있는 친구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어제로 시간을 돌리고 싶어진다. 다시 시간을 돌려서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똑같은 하루를 다시 한번 살고 싶다.
친구의 차를 타고 남한산성 숲길을 달리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여름을 바라보는 기억도 내가 사랑하는 여름의 풍경 속에 추가된다.
우리가 함께한 여름의 세계가 실로 오랜만에 팽창한다. 풍성한 여름 구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