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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Dec 21. 2021

글을 써라 그리고 역사가 되어라

시녀 이야기 The Handmaid's Tale

*책 시녀 이야기 스포주의


여자들은 자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느냐의 기준으로 여자들은 기득권의 대리모인 시녀, 집안일을 하는 유모, 죽을 때까지 방사능에 노출돼 일하는 강제노역자와 강제 노역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몸을 파는 창녀들로 나뉜다. 물론 기득권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예외지만 그들도 정혼에 묶여 남자에 종속된다. 사랑은 없는 시대이다.



며칠 전 The Handmaid's Tale이라는 책을 읽었다. 1985년에 출간 후 1990년대에 이미 영화로 제작되었고 최근 훌루에서 다시 시리즈로 제작되며 더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페미니즘이나 디스토피안 시스템에 대한 풍자로 부커상까지 받은 유명한 작품이어서 책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어로도 이미 많은 리뷰가 올라와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받은 조금 다른 감상은 '기록'에 대한 각성이었다.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이 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처음에는 아무리 집중해도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아서 결국 한 챕터만 겨우 읽고 손에서 놔버렸다. 어두운 내용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난해한 문체였다. 한국어 번역본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원서의 문체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처음에는 작가가 따옴표 쓰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문 번역이 아니고 제가 임의로 대충 한 거라 오역, 의역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해주세요.


p. 56

I’m laughing. She always made me laugh. But here? I say. Who’ll come? Who needs it? You’re never too young to learn, she says. Come on, it’ll be great. We’ll all pee in our pants laughing.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언제나 날 웃게 한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말한다. 누가 오겠어? 누가 그런 걸 필요로 하겠니? 배우는 데에 너무 어린 나이란 없어, 그녀가 말한다. 그러지 말고 가자, 끝내줄 거야. 웃다가 오줌을 지리게 될걸.


끝까지 읽고 나서야 따옴표는 현재 일어나는 대화에만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해한 문체는 물론 현재와 회상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시점도 꽤 세심한 집중력을 요한다.


작가가 시인이어서 그런지 시적인 묘사도 많아서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지만 몰입은 조금 더 어려워진다.



푸른 잎이 완연하게 돋아난 버드나무가 은근한 유혹의 속삭임을 던져오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버드나무는 '테라스에서 만나요'라고 속삭인다. 치찰음들은 열병 같은 전율로 등골을 훑는다. 여름용 원피스는 허벅지 살에 닿아 바스락거리고, 발 밑에서는 잔디가 자라고, 나뭇가지 위의 움직임이 눈가에 걸린다. 깃털들, 화드득 날아가는 움직임, 우아한 곡조로 나무가 새로 탈바꿈하느라 부산하다. 이제는 여신들이라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고 공기에는 욕망이 흠뻑 젖어들어 있다. 저택의 벽돌들마저 보드라워서 노곤노곤해진다.  벽에 몸을 기대면 따스하고 나긋나긋한 느낌일 테지. 

(시녀이야기 황금가지 출판 참조)


이렇게 난관이 많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자 축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처럼 커다란 감동이 터졌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가면 수십   연구자들의 학회로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자료는 다름 아닌 우리가 독자로서 목격한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을   전체가 그녀의 기록인 셈이고 마지막 장에서는 한참  소설  미래가 그녀의 기록을 발견한다. 흔히 Break the fourth wall(4 벽을 허물다, 매체  허구의 인물이 작품에서 나와 자신이나 관객을 인지하는 )이라고 하는 장치의 독특한 예로, 현재형으로 진행되던 주인공의 이야기가 순식간에  과거가 돼버리자 독자들에게 애수 비슷한 감정을 일으킨다.


p.57

The newspaper stories were like dreams to us, bad dreams dreamt by others. How awful, we would say, and they were, but they were awful without being believable. They were too melodramatic, they had a dimension that was not the dimension of our lives.

신문 기사들은 우리에게는 꿈같았다. 남들이 꾼 나쁜 악몽. 우리는 정말 끔찍하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 이야기들은 끔찍하기만 했지, 그럴듯하지는 않았다. 우리 삶의 범주를 벗어난 그 이야기들은 과장된 것처럼 들렸다.


주인공은 신문 한 면에 실린 끔찍한 사건, 사고 같았던 삶을 자신이 살게 되고 독자들은 그와 함께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길고 긴 절망 끝에 불확실하지만 나름의 해피 엔딩을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 내용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종이와 연필조차 금지되었던 그녀가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이 시녀로 갇혀 사는 삶을 탈출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녹음기에 대고 낭독을 했던 녹음본이 미래에 복원돼 연구 자료가 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의 문체, 시점 등 난해했던 모든 것의 아다리가 맞는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제야 시원하게 사이다를 들이켠다.


P.134

This is a reconstruction. All of it is a reconstruction. It’s a reconstruction now, in my head, as I lie flat on my single bed rehearsing what I should or shouldn’t have said, what I should or shouldn’t have done, how I should have played it.

이건 재구성된 기록이다. 모든 기록이 재구성이다. 싱글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했어야 하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지, 뭘 했어야 하고 하지 말았어야 하는지 떠올리는 지금조차 재구성이다.

(...)

When I get out of here, if I’m ever able to set this down, in any form, even in the form of one voice to another, it will be a reconstruction then too, at yet another remove. It’s impossible to say a thing exactly the way it was, because what you say can never be exact, you always have to leave something out, there are too many parts, sides, crosscurrents, nuances; too many gestures, which could mean this or that, too many shapes which can never be fully described, too many flavors, in the air or on the tongue.

내가 여기서 나가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든 어쨌든 어떤 형식으로든 이 일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조차 재구성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을 있었던 그대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은 절대 정확한 법이 없고 늘 과도한 부분이나, 비주류들, 뉘앙스들이 있어서 무언가를 빼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 혹은 저런 뜻이 될 수 있는 수많은 몸짓들. 자세하게 묘사할 수 없는 수많은 모양들. 공기 중에나 혀 끝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맛들.




무민 시리즈 중 하나인 무민 파파의 회고록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집주인인 내가 질풍 같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묘사하려니 손에 쥔 펜이 망설임으로 떨린다. 그러나 다른 위인의 회고록에서 찾은 인상적인 명언을 되새기며 자신감을 북돋고자 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진실하고 선량한 이가 세상에서 어떠한 좋은 일이나 좋다고 여겨지는 일을 이루어 냈다면 자신의 인생을 직접 글로 써야 함이 옳겠으나, 마흔 전에 이 아름다운 과업을 시작함은 시기상조다."


어떤 삶이 기록할 만한 삶인지, 언제 기록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지만 자신의 인생을 직접 글로 써야 함이 옳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역사라는 것은 진실도, 진리도 아니다. 역사는 쓰는 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헤로도투스는 자기가 아는 일들이나 들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은 그렇다고 썼고 남에게 들은 얘기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인류 최초의 역사서인 '역사'가 탄생했다.


너무 오래돼서 증명을 해내기 어려운 것들(모에리스 호수 한가운데에 피라미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이 대부분이지만 헤로도투스의 착각이었다고 증명된 이야기들도 많다. 지금도 인간사를 기록하면서 완벽하게 객관적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내 입맛대로 쓰려는 권력 때문도 미래에 기억되고자 함도 아니다. 그저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를 기록할 사람은 나뿐이다. 나의 경험을 가장 진실되게 기록할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나와 내 이야기에 충실하기 위해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글자로 한 자, 한 자 내려놓는 과정은 특별하지 않은 삶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나의 삶과 생각을 더듬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언어와 글자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나. 이게 바로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홍진경 님의 멋진 글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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