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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소방관 Jan 03. 2024

거식증 소녀의 엄마를 만났다

대학병원 소아병동 퇴원 당일 기적의 10분

둘째 혈관종 때문에 5박 6일 정도 소아병동에 보호자로 있었다. 6인실이었고 이런 저러한 이유로 입원한 아가들과 함께 했다. 우리처럼 잠깐 다녀가는 케이스도 있지만 집보다 병원에 더 오래 있는 케이스도 있었다. 둘째의 경우엔 약 복용 후 경과만 며칠 지켜보는 짧은 일정이었다. 다행히 경과는 좋았고 6일째 되는 날 오전 교수님 회진 때 퇴원 안내를 받았다. 퇴원하고 나서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외래로 경과를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웃으면서 말씀하시고 같은 방 다른 아이에게 가셨다.


일단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둘째랑 침대에 누웠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좀 더 자려고 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진찰해 주셨던 교수님께서 누군가에게 화를 내셨기 때문이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워낙 소녀 환자와 교수님의 목소리가 커서 듣게 되었는데... 흐름대로 정리해 보면,

소녀 환자: 몸무게가...(구체적인 숫자를 말하면서 몸무게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표현함)
교수님 의견: 숫자로 보이는 몸무게는 중요하지 않아! 너의 건강이 우선이라 체중 늘리는 치료에 집중하겠다!
소녀 의견: (뭐라고 대답하다가 마지막에는 크게 울면서 싫다고 함)


그러고 보니 전날 소녀 환자와 그녀의 엄마가 잠깐씩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소녀는 자주 엄마에게 본인이 어떤 걸 얼마나 잘 먹었는지 알렸고 엄마는 그런 딸에게 칭찬을 해줬다. 그땐 소녀가 왜 굳이 그런 걸 엄마한테 말할까 의아했다. 본인이 먹은 걸로 칭찬받고 싶어 하는 의도는 뭘까 궁금했다. 그런데 다음날 회진 때 교수님과 이야기하는 걸 듣고 그 퍼즐이 맞춰졌다. 하지만 혼자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말았다. 아는 척할 수 없었다. 그건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둘째가 퇴원할 시간이 되었다. 짐을 여러 개 옮겨야 하는데 아기는 안아달라고 울고 우왕좌왕했다. 그랬더니 지나가시던 그 소녀의 엄마께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짐 옮기는 걸 도와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10분 정도.


그녀의 딸은 10대 학생이고 발레를 배우고 있다. 키가 작은 편이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더 마르고 싶어 한다. 안 먹기 시작하면서 하루는 쓰러져서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원인 모른 체 다양한 검사만 받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혼자 생각했던 ‘그것’이 맞았다. 거식증이다.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야이다. 하지만 난 의사가 아니다. 대신 내 경험담을 살려 아주 솔직하게 하나하나씩 말씀드렸다.


저 또한 사춘기 때 외모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심하게 했고 결국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먹지 않아 거식증으로 살다가 대학교 진학 후엔 폭식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살 순 없다 생각하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들고 용기 내어 정신과에 갔고 몇 차례 상담받으며 우울증 약도 같이 복용했습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귀여운 아가들을 낳았습니다. 하루하루 조용할 틈 없고 힘들긴 하지만 차츰 제 병이 나아지고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폭식증 횟수가 조금씩 줄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깨달았습니다. 공허한 마음이 사랑으로 채워지니 마음의 병이었던 폭식증이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있던 것입니다.
미술심리치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대부분의 정신병은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유아 시기 때 부족했던 애착형성과 부모의 사랑은 훗날 어떠한 형태로든 문제로 발현된다고 봅니다. 어쨌든 자녀분께서 가지고 계신 병은 대학병원보다는 미술상담 같은 전문 상담가를 통해 치유하기를 추천드립니다. 정신병은 치유하는 것이지 치료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녀분께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사랑 주시면 나아질 거라 믿습니다. 어렵지만 하실 수 있으세요.


소녀의 엄마는 내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셨고 재차 감사하다는 말씀 해주셨다. 얘기하면서 이미 엘리베이터를 몇 차례나 보냈기 때문에 이젠 정말로 가야 했고 너무나도 짧았던 인연에 그분도 나도 아쉬움이 컸다. 부디 나의 진심이 그 소녀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라며 멀지 않은 미래에 건강을 되찾길 기원했다.


나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요

나 자신을 보듬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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