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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Aug 23. 2024

아름다운 계약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라면

라면은 김치라면을 비롯해 해물탕면, 짜파게티에 이르기까지 열아홉 개의 한글 자음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붙인 제품이 모두 출시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라면이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다양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키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신라면, 불닭볶음면은 어느덧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팔릴 정도로 다른 나라들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일본 닛신식품이 1958년 8월에 선보인 치킨라면이다. 닛신식품은 1971년 9월 최초의 컵라면인 컵누들도 생산하였다.



제일생명 사장 전중윤은 1961년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꿀꿀이죽은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가져다가 고기 뼈다귀를 골라 시래기와 함께 드럼통에 넣고 끓인 음식이다. 전중윤이 먹어 보니 깨진 단추에다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그 순간 ‘국민들은 이런 것도 음식이라고 줄까지 서가며 허기를 채우는데, 도대체 보험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이내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말았다.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다시 끓여 한 끼를 때우는 모습을 본 전중윤은 식량난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식량이 부족한 동포들이 값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며칠 후 그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시찰 여행을 떠났다. 도쿄를 방문했을 때 거리의 식품점에서 구입한 라면을 호텔 방에서 시식하였다.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몇 분 정도 지나서 뚜껑을 열었더니 맛있는 냄새가 온 방안에 진동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전중윤의 뇌리에 라면이 계속 떠올랐고, 국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1961년 8월 삼양식품을 창립하였다.



회사를 설립한 후 전중윤은 재일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인스턴트 라면의 제조기계 가격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일본에서 보내온 자료를 받아 보니 제면기계 한 대가 6만 달러로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당시 한국의 외화 부족은 해방 이후 줄곧 이어져온 무역수지 불균형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962년도 외화 보유액은 1억 6,000만 달러로 공식 집계되었지만, 가처분할 수 있는 외화는 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전중윤이 5개월 동안 상공부 등 관련 부처를 찾아가서 외화를 빌려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러 방안을 모색하다가 지인을 통해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서 당대에 최고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전중윤은 일본에서 가져온 라면을 먹어 보라고 권유했다. 김종필은 라면 한 젓가락이 입에 들어가자 “그동안 일본을 몇 번이나 갔는데 이런 맛은 처음”이라고 감탄했다. 전중윤은 “라면을 만들어 공급하면 국민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제조기계 한 대를 사려면 6만 달러가 필요하니 마련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종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더 연락해 알아보더니 미국의 경제원조로 3개월 뒤 농림부에 들어올 예정인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할당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63년 4월, 전중윤은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쿄에 도착하여 라면 회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아예 만나 주지도 않거나 겨우 면담에 성공했더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협조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닛신식품도 도움을 거부하였다. 전중윤은 모든 연줄을 동원해서 제면기계를 구입할 수 있는 실마리를 다시 찾아보았다. 그 결과 묘조식품의 사장 오쿠이 기요스미를 만날 수 있었다. 오쿠이는 전중윤에게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전중윤은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병사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보고 나서 싼 가격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라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이에 공감한 오쿠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싶은데, 중역들과 의논해 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서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전중윤을 만난 오쿠이는 공장에서 라면을 한 라인으로 생산하면 타산이 맞지 않으니 두 라인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어서 두 라인을 설치하는 비용은 모두 합하여 2만 7,000달러이고, 제면기계 회사가 묘조식품에 납품하는 것과 같은 가격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삼양식품이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묘조식품이 무상으로 기술을 지원해 주겠다고 말했다. 전중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럼 매출의 몇 퍼센트를 로열티로 지급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오쿠이는 “로열티도 필요 없다”고 답했다. 곧바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패전 후에 몹시 악화되었던 경제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곤 한국 특수로 크게 혜택을 입은 일본이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힘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했다.



오쿠이는 전중윤이 묘조식품의 란잔 공장에서 연수를 받고 라면 제조공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전중윤은 한 달 동안 공장으로 출근하며 밀가루를 면발로 만들어 튀기고 건조해서 포장하는 코스를 하루에 수십 번씩 돌았다. 각 과정마다 시간을 재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적으면서 라면을 제조하는 공정을 배우고 익혔다. 그런데 묘조식품에서 라면 기업의 핵심 비밀에 해당하는 스프 배합기술은 알려 주지 않았다.



전중윤은 연수를 끝내고 도쿄로 돌아와 묘조식품이 준비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제2항에는 “묘조식품은 삼양식품에 대하여 한일 친선을 위해 인스턴트 라면 제조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중윤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두 나라 사이에 이런 내용으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일정을 마쳐 귀국하려고 하네다 공항에서 트랩에 오른 전중윤한테 오쿠이 사장의 비서가 허겁지겁 달려와 봉투를 내밀었다.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니 오쿠이 기요스미가 상세히 적은 스프 배합표와 함께 메모가 들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로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스프 배합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 몇 명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배고픈 서민들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드시기 바랍니다."(무라야마 도시오, 《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그 뒤 묘조식품은 삼양식품에 기술자들을 파견해서 기계 설치공사를 마무리해 주었다. 기술자들은 삼양식품이 처음으로 라면을 만들 때까지 장치 운전과 생산 공정을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가난해서 한 끼의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동포들에게 더없이 고마운 음식을 선사한 전중윤. 배고픈 일본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한국인들을 위하여 따뜻한 마음을 선물한 오쿠이 기요스미. 두 기업인의 진실한 우의와 아름다운 계약으로 1963년 9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라면이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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