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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석 Aug 26. 2024

일상의 순간이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마법

“음악이라는 건,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만나게 해주는 마법 같아.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바로 음악이야.”



영화 <비긴 어게인>에 나오는 이 대사는 사람들이 음악에 매료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음악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하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저절로 즐겁고 상쾌한 마음이 일어난다. 처음 들었을 때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음악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준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는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앤디는 교도소 안에 재소자들이 원하는 물건을 구해다 주는 레드와 친해졌다. 앤디는 주정부에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매주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6년 뒤 주정부가 도서관에 쓸 돈과 함께 보내온 헌책과 물품을 정리하던 앤디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레코드판을 집어들었다. 앤디는 방송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편지 이중창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를 스피커로 내보낸다. 그 노래가 교도소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재소자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은 지상에 도달한 천상의 소리를 듣는 듯한 표정으로 노래를 감상한다.



레드는 나중에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한순간 쇼생크의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고 회고한다.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어

- 자전거 탄 풍경, <너에게 난 나에게 넌>



<클래식>의 주인공 지혜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선배 상민에게 마음이 끌린다. 어느 날 지혜가 비를 피하기 위해 교내의 넝쿨나무 아래 마련된 돌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비를 보고 있던 지혜의 눈에 상민이 멀리서 비를 피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운 건물의 처마 밑에 다다른 상민은 잠시 멈췄다가 지혜 쪽으로 달려왔다. 지혜는 가슴이 쿵쾅거린다. 지혜가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상민은 저고리를 벗어 우산처럼 가려준다. 상민의 손이 어깨에 닿자 지혜는 움찔한다. 상민과 지혜는 어깨를 맞대고 도서관까지 뛰어간다.



지혜는 이틀 뒤 비가 내릴 때 매점에 들렀다가 지난번에 상민이 점원에게 우산을 주고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혜가 창밖을 보자 그저께 비를 피해 벤치로 달려가던 그 장소가 훤히 보인다. 그때의 지혜처럼 누군가가 비를 피해 달려가고 있다. 상민이 지금처럼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지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상민의 사랑을 느끼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빗속을 달려가는 지혜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의 마음도 들뜨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은 황홀한 사랑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킨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음악원 작곡과를 다닐 때 다들 실력이 뛰어난데 나만 아닌 것 같아서 수치심을 느꼈어요”라고 고백했다. 당시에 작곡 지도교수로서 엔니오 모리코네를 아꼈던 현대음악의 거장 고프레도 페트라시. 스승은 1961년부터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한 제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순수) 음악인이 상업영화에 음악을 만들어주는 게 천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의견에 동조하는 음악인들과 다르게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음악의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싱어송라이터 브루스 스프링스턴은 “음악이 갈 길을 결정한 사람이죠”라고 격찬했다. 또한 <석양의 무법자>를 회고하며 “영화음악을 듣고 바로 나가 음반을 산 게 처음이었어요”라고 밝혔다. 영화 감독 베르나르도 베루톨로치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줬어요”라고 찬탄했고, 영화음악 작곡가 짐스 한머는 “엔니오 모리코네는 우리 인생의 사운드트랙이죠”라고 칭송했다.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를 떠올리며 “음악 덕분에 내가 부각됐죠.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라고 평했다.(주세페 토르나토레,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미션>의 영화음악을 맡아달라고 제안받았을 때 엔니오 모리코네는 음악이 필요없는 영화라고 판단해서 거절했다. 음악이 오히려 영화를 망칠 수 있어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영감이 떠올라 ‘오보에’를 작곡해서 영화감독에게 보냈다. ‘오보에’를 감상한 롤랑 조페 감독은 “머리가 쭈뼜했어요. 음악을 들으니 영화가 펼쳐졌어요”라고 회고했다.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펼쳐내는 선율은 우리의 내면을 지극히 고요하고 아늑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은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반해 꼭 노래로 불러보고 싶었다. 주변에서 엔니오 모리코네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누군가가 자신이 만든 연주곡을 훼손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 사람을 모두 동원해서 간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2개월마다 편지를 쓰며 3년 가까이 매달린 끝에 불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녹음한 노래를 보냈더니 맘에 든다는 답변이 왔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넬라 판타지아’이다. 이탈리아어로 가사를 붙인 이 노래의 제목을 해석하면 ‘환상 속에서’를 뜻한다.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고프레도 페트라시의 제자였던 작곡가 보리스 포레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보고 “영화음악에 대한 통념을 뛰어넘은 걸작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엔니오 모리코네한테 편지를 보내 영화음악에 대한 클래식 음악인들의 편견을 사과했다. 보리스 포레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20년 이상 깎아내려 헐뜯었던 상대를 치켜세웠다.



아카데미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진가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연출한 <헤이트풀 8>로 여섯 번의 후보 지명 끝에 드디어 음악상을 수상한다. 그보다 앞서 200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공로상을 받았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마음속으로 수상을 포기한 지 한참 지난 때였다. 그는 시상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는 상을 받고 눈시울을 적셨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2020년 7월 6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배우 조승우는 2024년 1월 15일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8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자 부문 주연상을 받았다. 조승우는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남겼다.



“저는 2000년 2월 극단 학전에서 뮤지컬 의형제로 데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학전이 33년 만에 폐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민기 선생님은 저에게 스승님이시자 아버지이시자 친구이시자 가장 편하고 친한 동료이셨습니다. 지금 투병 중이신데요. 이 모든 상의 영광을 학전과 김민기 선생님께 바치겠습니다.”(이동원․고혜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김민기는 1991년 3월 15일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에서 <학전> 소극장을 개관하였다. 1994년 극단 학전을 정식으로 창단하였고, 2024년 3월 15일 소극장 문을 닫았다. 그동안 <학전>이 기획한 콘서트, 뮤지컬, 연극 공연을 통해 수많은 예술인들이 배출되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 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속엔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열차 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기적소리 멀어지면 작아지는 모습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뒷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 김현성, <이등병의 편지>



김광석이 불러 널리 사랑받은 ‘이등병의 편지’는 김현성이 제일 먼저 부른 노래다. 1983년에 이 곡을 작사하고 작곡한 김현성은 “군대 가는 친구를 서울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후 1990년 한겨레 신문사가 제작하고 김민기가 총감독한 <겨레의 노래 1> 음반에 전인권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겨레의 노래> 전국 순회공연에 전인권이 종종 불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전인권 대신 김광석이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김광석의 큰형은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사망했다. 김광석은 1995년 7월 20일 팬 동호회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놓았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열한 살 차이 나던 큰형님이 군대 가셨다. 일주일쯤 지난 뒤 형님이 입고 가셨던 옷가지들이 누런 봉투에 담겨 집으로 배달되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처음 부를 때는 어머니께서 빨래하시며 우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1980년 10월 결혼식을 20일 남기고 돌아가신 큰형님도 생각이 났다. 그때 형님은 육군 대위였다. ‘이등병의 편지’는 어머님, 큰형님을 생각나게 해서 노래를 부르며 울먹거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2013년 오마이뉴스 기자가 김현성에게 ‘이등병의 편지’를 어떤 노래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김현성은 “내 노래가 혼자 골목길을 가다 만난 별빛처럼, 가로등처럼 소리 없이 잔잔한 위로를 주는 음악이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1990년 이등병의 편지를 처음 듣고 부른 김광석은 1995년 8월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공연 기록을 달성했고, <학전>을 상징하는 가수로 우뚝 섰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김민기, <아침 이슬>



김민기가 만든 ‘아침 이슬’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젊은이들이 반독재를 외치는 현장에서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아침 이슬’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다.



어떤 음악은 기억의 물감을 풀어 멋진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음악은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아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준다. 어떤 음악은 천상의 소리로 자유를 느끼게 하고, 어떤 음악은 지극히 고요하고 아늑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어떤 음악은 사랑의 황홀함을 고조시키고, 어떤 음악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의 순간이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마법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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