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비를 ‘두 분’이라고 일컫는 양반 가문이 있었다. 경주 최 부잣집이다.
1636년 12월 13일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12월 16일 임금이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정은 부랴부랴 각 도에 공문을 보내어 임금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최진립은 69세의 나이로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진격했다. 1637년 1월 2일 경기도 용인에서 청나라 군대와 대치했을 때 총지휘관 이의배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총지휘관이 도주한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를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다. 하루 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해 질 무렵이 되자 탄약과 화살도 떨어지고 병력도 모자라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 등이 전사했다. 군사를 일으켜 전투에 참여한 최진립도 장렬히 순국했다.
최진립을 도우러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주인의 귀가 명령을 듣지 않고 순절한 두 노비가 있었다. 두 노비의 이름은 옥동과 기별이다. 용인 전투에서 최진립은 자신을 평생 동안 모시느라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옥동과 기별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응답했다. 후손들은 최진립 장군의 기일에 ‘두 분'이라고 칭하는 옥동과 기별의 제사를 함께 지내오고 있다. 이는 엄격하게 신분을 구별하는 여러 양반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다.
최진립의 셋째 아들 최동량은 형산강 상류의 물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둑을 쌓아 땅을 개간했다. 최동량은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물을 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제를 적용했다.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인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 부잣집에 알렸다.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가 최동량에게 땅을 팔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동량의 맏아들 최국선은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벼농사를 지을 때 못자리에서 모를 따로 키운 다음 본래의 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법이다. 고려시대 때부터 행해져 온 농사 기법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부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 때문이었다. 이앙법은 가뭄이 심해 물을 댈 수 없으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직파법은 논에 직접 씨앗을 뿌려 농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이다. 직파법으로 농사하면 벼를 수확할 때까지 계속해서 잡초를 뽑아야 한다. 만약 일손이 부족해서 잡초를 그냥 두면 벼는 금세 말라죽는다. 잡초가 땅의 영양분을 빨아먹기 때문이다.
이앙법을 사용하면 제초 작업이 간단해져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고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최동량이 개천 둑을 정비하고 수로시설을 갖추어 놓은 덕분에 최 부자네 땅은 가뭄이나 홍수를 이겨낼 수 있었다. 최국선이 농사짓는 일손은 줄이고 수확량은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이앙법을 실행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국선은 부근에서 가장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에 들어 있는 담보 문서를 모두 꺼내오라고 했다. 최국선은 땅문서와 집문서는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했다. 이어서 돈을 빌려준 장부와 돈을 갚겠다고 쓴 문서는 모아서 태워버리라고 덧붙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연달아 들은 아들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최국선은 이렇게 설명했다.
“돈을 갚을 사람이라면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다. 하지만 갚지 못할 사람은 담보가 수십 장 있어도 갚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과 땅을 빼앗는 것은 마지막 희망을 빼앗는 것과 같다.”(심현정, 《3백 년을 이어온 최고의 명가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
1671년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최국선은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고 명했다. 큰 솥에 매일 죽을 끓였다. 멀리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최 부잣집으로 몰려들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더해졌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국선의 곳간에서 나온 곡식을 먹은 이들은 경주뿐 아니라 포항, 영천, 밀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보릿고개인 3월과 4월에는 한 달에 100석씩 쌀을 나누어주었다.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쌀을 얻어다 죽을 쑤어 먹었다. 어떤 때는 800석이나 들어갈 정도로 큰 곳간이 텅 비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