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은 1937년 2월 도쿄에서 영국인 골동품 수집가인 존 개스비를 만났다. 개스비는 20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고려청자 22점을 모았다. 사흘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가격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결렬되었다. 전형필은 그해 4월 서울에 온 개스비에게 박물관 보화관(간송미술관) 건축 현장을 보여주었다. 개스비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면서도, 과거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겠다며 박물관을 짓고 있는 식민지 청년의 생각이 기특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개스비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선생, 이곳에 와서 보니 전 선생이 단순한 수집욕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이 만든 청자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시 찾아오려 한다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그것도 아주 가슴 깊이…… 저는 조국의 대영박물관에 돈을 받고 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 선생은 자신의 돈으로 구입해서 직접 지은 박물관에 진열하겠다니 머리가 숙여집니다. 전 선생, 제가 양보해서 40만 원에 넘겨 드리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22점 가운데 조그만 청자 두 점은 제가 보관하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이충렬, 《간송 전형필》)
40만 원은 전형필도 예상한 가격이지만, 22점이 아니라 20점이니 한 점당 2만 원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기와집 400채 값에 드디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기와집 400채는 요즘 아파트의 최소 시세로 계산해도 1,200억 원이다. 전형필은 고려청자 20점을 사기 위해 논 1만 마지기를 내놓았다.
전형필은 스물네 살 때인 1929년 서울과 경기도, 황해도와 충청도에 논 800만 평(4만 마지기)을 소유한 전씨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어림잡아 지금의 재산 가치로 계산하면 6,000억 원에 이른다. 전형필이 고려청자를 사기 위해 내놓은 논 1만 마지기면 80킬로그램 쌀 1만 가마니를 수확할 수 있었다. 아무리 소중한 문화재라 해도 해마다 엄청난 수입을 보장해주는 논을 1만 마지기나 내놓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결단이 아니었다.
김태준은 대학을 졸업한 후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과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총명했고 발표하는 글의 수준이 높아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1940년 어느 여름날 제자 이용준이 스승에게 자신의 집에 가보로 전해내려오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김태준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한 전형필은 당장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김태준은 우선 진위를 확인하자고 했다. 그는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제자와 함께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김태준이 자세히 살펴보니 틀림없는 진본이었다. 그런데 첫머리 두 장이 없었다. 스승 김태준과 제자 이용준이 찢어진 두 장을 복원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상룡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지하 조직에 속해 있었던 김태준은 안동을 떠나야 했다. 낯선 사람이 시골에 오래 머물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이관술을 시작으로 이현상, 김상룡이 검거되었고 김태준도 붙잡혔다.
김태준은 2년 뒤인 1943년 여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전형필이 사회주의자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형필은 김태준을 만난다. 전형필은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례본을 만들라고 명했다.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 여덟 명에게 문자를 새로 만든 목적과 원리, 그리고 글꼴을 결합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해례본을 만들게 했다.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글자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했고, 해례본도 함께 배포했다.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가운데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면서 품속에 넣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잤다.
간송 전형필은 스물다섯 살 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15년 동안 문화재들을 수집했다. 전형필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걸쳐 있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작품들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조선의 서화는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이 문화재들은 전형필이 서른두 살에 설립한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주 최 부잣집은 3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었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얼과 혼을 간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렇게 자신이 소유한 부를 이웃과 겨레를 위해 아낌없이 쓰는 부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