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꿈엔들 차마 잊힐 리 없다고 노래한 그곳은 바로 고향이다. 사람들은 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미완성 상태로 태어난 뇌가 사람이 경험한 주변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고 적절하게 완성되기 때문이다. 고향은 어릴 적 경험한 음식과 소리, 사람과 풍경이 뇌에 최적화된 곳이라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뇌는 이전에 겪은 일을 수정하거나 완전히 새롭게 쓰기도 한다. 현재의 감정과 생각이 뇌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특정한 사건이나 오랫동안 유지한 경험을 왜곡하여 기억할 수 있다.
이처럼 뇌를 아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고 세상의 일부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 저술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는 각각 90달러와 10달러 가격표가 붙은 포도주를 맛보는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은 90달러짜리가 더 맛있다고 답했지만 실은 똑같은 내용물이었다. 이 실험에서 핵심은 시음하는 동안 촬영한 참가자들의 뇌 자기공명영상이었다. 놀랍게도 비싼 가격표를 단 포도주를 마실 때 쾌락적 경험과 관련이 있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결국 물리적으로는 같은 포도주이지만 맛은 정말 달랐던 셈이다.
2009년 맥카페가 우리나라에 커피를 선보이며 포도주 시음과 비슷한 실험을 했다. 2,000원과 4,000원이라고 적혀 있는 두 개의 컵에 같은 커피를 담아 맛보게 했다. 그런데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4,000원짜리 커피가 2,000원짜리 커피보다 더 맛있다고 답했다. 그렇게 느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00원짜리 커피는 신맛이 좀 더 강한 거 같은데, 4,000원짜리는 원두 향이 더 깊게 나는 거 같아요."
"4,000원짜리 커피가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향이 조금 더 진하고 자꾸 손이 가게 되는 거 같아요."
"4,000원짜리가 시럽이나 설탕을 안 섞어 먹어도 될 만큼 딱 알맞게 맛있어요."
두 커피는 같은 제품인데도 선입견이 작용하여 혀에 느껴지는 맛이 달랐던 것이다. 이는 가격이 비싸면 맛있다는 생각이 미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혀로 받아들인 맛에 관한 정보는 미각 영역에서 먼저 처리되고, 그 정보가 뇌로 보내진다. 그러므로 외부의 정보인 맛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감지하는 것은 미각이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미각 영역은 다르게 반응한다. 같은 음식인데도 '맛이 있을 것이다' 혹은 '맛이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만으로도 맛을 다르게 느낀다. 음식을 먹을 때 맛뿐만 아니라 모양이나 식기, 분위기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생각이 실제로 미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경치가 멋지거나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즐겁게 먹는 음식을 제일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사실과 믿음이 다를 경우 사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할 때 안내하는 직원이 손님에게 신상 정보를 적어 달라고 요청한다. 손님이 책상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이고 필요한 사항을 적는다. 그때 프런트 안내원을 재빨리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다. 손님이 내용을 다 적고 용지를 건네면서 안내원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까.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안내하는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런 믿음이 상대가 교체된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안내원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의 한 의학연구소에서 '생각과 몸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실험을 했다. 사형수들에게 몸에서 피가 얼마나 빠져나가면 죽는지 알아보는 실험에 참여할 경우 10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실험에 지원한 세 사람을 수술대에 눕히고 손과 발을 묶고 안대로 눈을 가렸다. 수술대 밑에는 물을 받는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의사가 동맥을 자른다고 말하면서 칼날 대신 칼등으로 팔목을 그었다. 피가 양동이로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는 효과음도 연출했다. "피가 더 나올 수 있도록 심장을 누르겠다"는 말과 함께 가슴을 힘껏 누르는 동작이 이어졌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세 사람은 모두 죽었다.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뇌가 '나는 죽었다'고 믿는 순간 숨이 끊어졌다. 피를 많이 흘려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뇌에 영향을 주어 몸이 변화하도록 만든 것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뇌에 영향을 끼치는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커다란 뇌 스캐너 안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는다.
"당신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집을 향해 운전하고 있습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길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잠시 눈을 감습니다.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화들짝 깨어납니다. 핸들이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느낍니다."
설명을 들을 때 실험 참가자들은 가만히 누워 있는 상태였지만 운동에 관여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증가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시각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가장 경이로운 점은 심박수.호흡.신진대사․면역체계․호르몬의 활동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가 단어들의 의미를 처리하면서 일어난다.
말이 우리한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뇌에서 언어를 처리하는 영역들이 몸 내부도 제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체의 주요기관과 계통들도 포함된다. 과학자들이 ‘언어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곳에 포함된 뇌 영역들은 우리의 심박수를 높이거나 낮추도록 안내한다. 또 세포에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혈류로 들어가는 포도당을 조절하며, 면역체계를 지원하는 화학물질의 흐름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말은 인체를 조절하는 도구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나의 뇌 활동과 신체계통에 직접 영향을 주고, 내가 하는 말 역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친다. 그만큼 우리가 하는 말이 마음에 상처를 남길 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달간 지속적으로 언어폭력에 노출되면 ‘말’은 뇌를 조금씩 갉아먹어 몸에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세계 원주율(π)의 날인 2004년 3월 14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에 있는 과학사박물관. 다니엘 타멧이 “3.14159…”에서 “…53587”까지 원주율 소수점 이하 2만 2,514개의 숫자를 다섯 시간 9분에 걸쳐 암송해냈다. 암송이 끝나자 청중들은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다니엘 타멧은 어릴 때 간질 발작으로 뇌기능에 장애가 오면서 자폐증과 천재성을 동시에 지니는 ‘서번트(savant) 증후군’을 갖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간질이 생긴 좌뇌의 손상을 보상하기 위해 수리능력과 연관된 우뇌가 발달하면서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레인맨’의 실제 모델인 킴 픽은 두개골에 물주머니가 차서 머리가 부푼 상태로 태어났다. 결국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좌반구가 손상됐지만 16개월 만에 글을 읽었다. 그는 한쪽 눈에 한 페이지씩, 두 페이지를 동시에 읽을 수 있었으며 그 내용을 완벽히 기억해냈다. 킴 픽은 총 9,000권이 넘는 책을 외웠고,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우는 게 취미였다(킴 픽은 2009년 12월 1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04년 7월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 시립도서관에서 다니엘 타멧과 킴 픽이 만났다. 두 사람은 처음에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저는 1979년 1월 31일에 태어났어요.”(다니엘 타멧)
“예순다섯 생일이 일요일이로군. 난 1951년 11월 11일에 태어났어.”(킴 픽)
“당신은 일요일에 태어났네요.”(다니엘 타멧)
다니엘 타멧은 현재 10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아이슬란드어를 익혔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있다.
이토록 사람의 뇌는 놀랍고 신기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흥미나 주의력이 높아질 때 가장 활성화되고 똑똑해진다.
"놀랍고 신기한 뇌, 그리고 ……"